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 지 Feb 15. 2024

흐린 겨울 하늘 아래

길을 걸을 때면 지나던 사람들이 한 번씩 뒤돌아볼  정도로 시선을 받던 미인이었다. 다니던 회사의 미인 선발대회에서 1등으로 뽑힌 적도 있었지만 유난스러운 것을 싫어하는 친구는 그런 시선과 사건들을 그냥 스쳐가는 한 순간의 해프닝으로 넘기며 일상을 지냈다.


스무 살의 어느 날 친구들과 수다를 떨던 카페에서 휴가를 나온 공군부대원 세명의 합석 제안을 받았다. 3대 3 즉석 만남. 잠깐의 대화로 끝날 것 같았던  우연이었으나 그중 한 명의 집이 우리 동네였기에 그와의 만남만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눈이 오는 활주로에서 눈사역을 하며 부른다는 가수 김수철의  '나두야 간다'를 개사한 노래를 친구들 앞에서 흥겹게 부르기도 했던, 공군부대의 정복이 더 할 수 없이 잘 어울리는 큰 키와 피부, 단정한 목소리에 미소가 환하던 그는 전역한 후에도 우리 친구들과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내 그의 부모님과 동생들까지 인사를 하며 지내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의 아름다운 결혼식이 내 친구들 중 첫 번째 결혼식이었다.


내가 공부를 마치고 시험을 보고 발령을 받고 결혼을 하고 아이 둘을 낳아 키우고 퇴직을 하기까지의 시간이 가는 동안 친구 부부 또한 아들 둘을 낳고 직장을 다니다 비디오샵을 차리고 다시 회사 생활을 하다 또 식당을 차리고 그러면서 분주히 살았다.


서로가 서로의 삶을 살아내느라 분주했던 시절에 일 에 한두 차례 안부를 전하는 것전부였고  아주 오랫동안 연락이 끊어진 시기도 있었다.


제법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난 뒤 다시 연락이 되었을 때 친구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남편이 위암에 걸려 위를 전부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 5년이 지났으니 이제 재발 가능성이 적은 시기에 들어섰다고 엊그제 잠깐 겪은 일인 것처럼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친구였다.


한 때 빛나던 순간은 그로써 접어두고 주어진 일상을 사는 일에 내리내리 충실한 내 친구는 어떤 힘든 일에 대해서도 한마디 불평을 하지 않으며 뚝심 있는 모습으로 헤쳐 나왔다.


그의 식당에 가서 음식 밑손질하는 것을 보다가 나는 혀를 내두른 적도 있었는데 무한리필되는 홍합탕을 끓이기 위해 홍합 한 자루를 개수대에 쏟아놓고는 하나하나 손질을 하며 어찌나 박박 닦고 헹구는지 보다 못한 내가 '너무 그렇게 깨끗하게 닦아내면 맛있는 국물맛이 우러나지 않을 것 같다'라고 한소리를 해야 할 정도였다. '손님 상에 나가는 건데 이물질이 한 개라도 나오면 안 된다'라고 말하면서 홍합 껍데기가 맨질맨질 윤이 나도록 닦아내는 그가 나는 무척 자랑스러웠다.


새해가 며칠 지나지 않은 한 늦은 밤에 전화가 걸려왔다. 밤늦은 시간에는 전화를 하지 않는 친구였기에 난 조금 반갑고 많이 염려가 되는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있잖아.... 남편 술밖에 안 먹어. 좀 오래된 습관이야. 내가 챙겨주는 음식은 입에도 안 대고 하루 종일 술만 먹다가 쓰러져서 병원에 석 달 동안 입원했었는데 퇴원하고 집에 돌아와서도 여전하네. 엊그제 슈퍼에서 술 한 박스를  배달시키던데 사흘도 안 됐는데 여섯 병밖에 안 남았어... "


가장으로서의 책임감만 남은 병든 몸이 부인과 아들이 식당 일로 바쁜 시간 내내 벌써 오랜 기간을 그렇게 지내고 있는 중이었다고 말하는 친구의 담담한 목소리에 짙은 수심이 담겨있었다. 그동안 내게 감추어오던 색깔목소리였다.


알코올중독관리해 주는 병원이 있는지 함께 알아보러 다니자고  말하면서 만날 시간을 정하는데 친구가 아들과 함께 가야 한다고  말했다. 


천천히 가슴이 아려왔다.


우리들의 가장 빛나고 행복했던 시절은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에 박제되어 있지 않은가. 

젊은 엄마 아빠의 시절을 보내는 우리들의 시간에 한 순간도 빠지지 않고 들어와 앉은, 바로 우리 자신인 아이들. 울고 웃고 화내고 감격하고 절망하고 난감했던 모든 순간순간에 전적으로 끊임없는 기쁨이 되어준 아이들. 존재 자체가 삶의 의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기에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늘 다짐하게 해 주던 아이들에게 이제 늙고 병든 '우리'를 의탁할 곳을 상담해 달라는 부탁을 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 둔탁하지만 아리도록 가슴을 철렁이게 했다.


우리는 오랫동안 통화를 했다.

전화를 끊고 난 뒤 옆에서 조용히 나의 통화를 듣고 있던 딸에게 물었다.


"엄마 친구가 남편을 요양병원에 모시기 위해 상담하러 가야 한다네. 내가 같이 가려고 하는데 친구가 아들도 함께 동행해야 한다고 해. 엄마도 할머니를 요양병원에 모셨잖아. 엄마랑 아빠도 아마 그리 오래지 않은 때에 요양병원에 가게 될지도 모르고 말이야. 네가 생각하기에 그 아들의 마음이 말이야, 요양병원에 아빠를 입원시켜야 하는 그 마음이 어떨 것 같아?"


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잘 정리가 되지는 않았지만 대답을 해 주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은 듯 천천히 말을 했다.


"그게... 엄마. 우리는 어릴 때부터 어린이집에서 생활해서... 그러니까... 필요해진다면 그런 기관에 가게 되는 것에 대해 딱히 나쁜 일이라는 생각이 없는데..... 잘 모르겠어, 엄마..."


또다시 커다란 무게감이 가슴을 치며 한가운데로 들어와 앉았다.


그렇지. 나는 내 아이들이 어릴 때 어린이집에 보냈었지. 같은 반 아이들이 다 귀가하고 난 뒤 혼자 교실에 아서 엄마가 언제 오나 기다렸다는 어린 딸을 차에 태우고 집에 돌아오는 날이 여러 날이 있었지. 아이들은 그곳에서 매일같이 엄마 아빠를 기다리며 지냈었지...




흐린 겨울의 한 낮, 나는 친구와 그의 아들과 함께 요양병원을 방문했다.


아... 어쩌면... 끝내 이리 비루해질 삶의 끝자락 즈음이라니.... 초라한 어깨와 힘없는 무릎과  빛바랜 머리칼과 깊은 얼굴의 주름을 마주해야만 하는 시간들을 만나고 있지만 씩씩하게, 때론 조금은 서글프지만 그러나 매번 잘 넘겨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랑 그 자체의 덩어리인 아들에게 병들어 우울한 몸을 의탁해야 하는 때가 오고야 만 친구와 함께 흐린 겨울의 하늘 아래에 선 나는 그들의 눈부셨던 시절이 어제 일처럼 떠올랐고 아마도 잠깐동안 와 나는 동시에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 아들이 곁에 서서 우리를 보고있었으므로 우리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무심한 표정을 자꾸만 꺼내어가며 담담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시간은 아닐 거야. 아빠가 너희들에게 짐이 되지 않는 건강한 모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계시니,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잘 이겨내려고 애쓰시는 중이니 얼른 일상으로 돌아오시게 될 거야. 밥 잘 먹고 잘 자고 열심히 일 하다 보면 얼른 그날이 오게 될 테니 건강 잘 지키면서 기다리자, 우리는....


그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우리는 더는 말이 없었다.


슬픔은 굳이 덜어내려 하지 않았다.

슬픔은 슬픔대로 내버려 둔 채 우리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여전히 겨울이었다.

늦도록 날은 흐렸다.

작가의 이전글 엄마가, 엄마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