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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Feb 22. 2024

먹고 살 보람을 찾아 길 떠나는 자녀를 위해

내리내리 사랑한다는 것은

부모를 이겨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긴 인생 여정에 종종 어려움을 겪게 될 경우가 많다고 한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없다는 속담도 있는 것으로 보아 자녀는 종래에는 부모를 넘겨야 하는 인생 과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많은 '충고'들처럼 '자녀에게 져 주라'는 말 자체를 내 것으로 삼아가는 길은 말도 못 할 정도로 험난하기만 하다. 자녀에게 '충고'하는 일이 몸에 베인 습관인데 이제 입을 다물고 자녀의 '충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필시 잘 되지 않는 일이니 틈날 때마다 되풀이하고 되뇌라는 의도로서 '자식 이기는 부모는 없다'는 속담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리라.


아들과 불화하는 아버지에게도 그런 말씀을 드렸었다.

'아들을 위해서 크게 한 번 져 주시는 건 어떻게 생각하셔요? 그게 아들이 살아가는데 평생 도움이 된다고 해서요...'

아들이 아들답지 못한데 굳이 그 아들에게 져 줄 이유가 없다고 돌아앉으시던 아버지였지만 이제 천천히 당신의 며느리와 대화를 시작하고 계신 중이다. 그러니 부모의 숙명이란 것은 인생의 긴 여정을 떠나는 자녀를 위해 늙고 힘든 모습으로도 여전히 애정을 담은 응원만을 보내는 것이리라고 천천히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 '져 줌'이 내 과제가 아닌 타인(아버지와 엄마를 포함하는)의 과제일 때는 쉽게 입에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이 '나의 과제'가 되었음을 깨달아가는 지금 이 순간, 여전히 낯설지만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다음 단계의 성장을 이루어야 하는 자녀를 위해 잘 되지 않는 '입 다물기'를 연습하고 있는 중이다.

 



취업면접을 하고 탈락 통지를 받을 때마다 딸은 휘청거렸다.

달리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는 나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면접 탈락이 스스로의 유용성에 대한 의심으로 번지지 않기만을 당부할 뿐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눈높이를 많이 낮추어서 취업지원서류를 내 보는 것은 어떨까 묻기도 했었다. 딸이 듣기에 좋지 않을 말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냥 어떻게든 사회에 생활인으로 발을 디뎌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었다.


"엄마, 올해까지만 전업자녀 지원 해 줘. 응?"


딸은 기죽지도 않고 화내지도 않으면서 차근차근 자신의 마음을 말해주었다.


"젊으니까 어떤 일이든 시작하면 먹고사는 일은 할 수 있다는 것은 알아, 엄마. 그렇지만 지금 내가 그렇게 시작하는 일이 평생직장이 될 가능성이 아주 많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아무 일이나 덥석 시작하는 건 조금 마음이 복잡해. 아직까지는 내가 배운 전공을 살려서 직업을 갖고 싶은데, 그리고 구인공고를 찾아보면 충분히 취업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회사도 있는데, 내 가치관에 맞지 않는 회사에 지원을 할 수는 없어서 조금 커트라인이 높은 회사로 서류를 내고 있어. 내년이 되면 마트 알바라도 하면서 독립을 할 테니까 올해까진 전업자녀로 받아주길 부탁해 엄마..."


대학원에 진학해서 연구분야를 정해 전문지식을 쌓는 건 어떤지 물어도 대답은 같았다.


" IT 개발 업무는 분야가 너무 다양하고 변화 속도도 너무나 빨라서 내가 한 가지 분야를 정해서 연구하는 동안 그 분야가 순식간에 고인 물이 되어버리곤 하는 일이 자주 있어. 지금은 섣부르게 연구과제를 정해서 공부에 몰입하기에는 내가 자신이 없다, 엄마. 내가 연구하던 과제가 빠르게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렸을 때 재빠르게 다른 연구 과제로 전환시키는 능력이 나한테는 없거든. 일단 현업에 종사하면서 꼭 하고 싶고 필요한  연구과제가 생기면 대학원에 진학할 거야. 먹고사는 일이 중요하다는 거 알아. 엄마. 그런데 좀 이상한 말이겠지만 난 '먹고 살 보람'도 중요해서...."


'먹고 살 보람'이라...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딸의 마음이 한순간에 화악 전해져 왔다. 사실 조금 대견했다. 딸의 그런 말, 그런 표현을 들으면서 나는 이후의 모든 잔소리를 중지했다. (솔직히는 중지하려고 애썼다는 말이 더 가깝다.)


'알았으니까 탈락 통지를 받아도 휘청거리지 '고, '하루에 곳씩 최소한 삼백 곳의 직장에 서류를 제출'  보라는 당부만 거듭했다. 


면접을 보고 와서 탈락통지를 받고 사나흘 침잠하다 와라락 대여섯 군데 지원서류를 내고 하는 반복이 한참을 갔다.

 



드디어 그날이 왔다.

영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날.

두 번의 면접과 테스트를 거쳐서 합격통보를 받고 입사 서류를 준비하는 날.


사진을 찍고 구비서류를 준비하면서 연휴가 가기를 기다리는 모든 날 동안 우리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일상을 보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전업자녀 종료일인 첫 출근일을 기다리는 우리 가족은 무척 행복했고, '이제 한 달 교통비랑 점심값만 주면 그다음부터는 용돈을 안 줘도 되는' 것이 무엇보다 홀가분한 일이라고 농담을 섞어가면서 기쁘고 행복한 말들만 주고받았다.


'인사 잘하는 보릿자루'가 되겠다고 말하며 딸은 첫 출근을 했고, 둘째 날, 셋째 날이 지나고.... 일주일이 되지 않은 날 첫 출장을 갔다.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지만 잘 따라다니는 보릿자루'라고 스스로 말을 한다.


이제부터 험한 세상살이를 혼자서 헤쳐나가야 할 딸에게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게 '잘 보고, 잘 묻고, 잘 배우고, 잘 따라 하면서 역량을 익혀 마침내 꼭 필요한 업무를 수행해 내기를' 응원하는 것뿐이니 우리는 날마다 그렇게 딸을 향해 최대한의 기쁨과 최소한의 기대를 말하며 출퇴근 인사를 한다.


먹고 살 보람을 찾아 지루한 취업준비 기간을 보낸 딸에게 이제부터 정말로 '져 주는 부모'의 역할을 해할 것 같지만 '져 준다는 것'에 대해 잘 모르는 우리 부부는 딸이 떠나 커다래진 빈 공간을 미소로 채워가며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아무 경력이 없는 완전 초짜의 신입사원으로 딸을 받아준 회사가 무조건 고맙기만 한데, 복잡한 산업공단의  출장지까지 함께 가서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해 차근차근 보고 배울 수 있게 해 주기까지 한다니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울 따름이라는 그런 이야기.


딸은 차차 인생살이의 고된 면면들과 자주 부딪히곤 할 것이다. 집을 나와 길을 떠나는 모든 세상 사람들의 숙명이 그런 것처럼. 그리고 고된 인생살이의 마디마디, 고비고비마다 숨어있던  보람 한줄기가 나타나 세상에 든든히 설 수 있게 하는 양분이 되어 줄 것이다.




쉽지 않았던 나와 남편의 부모님들에게서 내가 기어이 받아 낸 것은 종국에는 '네가 참 잘 살았구나'하는 말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말 한마디는 이제껏 내가 세상의 어떤 사람들에게 들었던 칭찬보다 가장 마음이 따뜻해지는 말이었다.

'세상에 더없이 완벽한 부모'가 되고 싶었으나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것을 천천히 알아가는 일이 나의 '지천명'일지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내가 나의 부모님에게 들었던 그 칭찬의 말 한마디가 떠오르는 순간 '나의 부모님'은 '세상에 더없이 완벽한 부모'였다는 깨달음이 마음 한가운데에 봄바람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넘기 힘든 벽으로 여겨져서 매 순간순간 좌절을  느끼게 만드는 지적을 하시던 부모님들이 홀연 반복되던 지적을 멈추고 그리 말씀을 해 주셨다는 것은 완벽한 의미로 나에게 져 주시겠다는 선언과 다름이 없었다.

내가 딱히 잘한 것이 있어 그런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었으니 아마도 그건 그저 부모님이 내게 주실 수 있는 최대치의 축복이었다.


인생이란 결국 '내가 스스로 그리는 그림'이다.


나 역시 천천히 세상에 더없이 완벽히 '자녀에게 져 주는 부모'가 되어 가기 위해서 내가 부모님께 받았던 것 중 가장 큰 칭찬의 말, 그 한 가지의 응원의 말을 내 자녀들에게 매일매일 반복하며 하루하루를 지내기로 한다.


부모는 분명 너희들에게 벽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가장 넘기 쉬운 말랑말랑한 벽이다.

인생의 고비마다 등장하게 될 모든 어려움들을 부모의 벽을 넘어가듯 기어이 겨내어서 그것들이 감추고 있는 달큰한 열매들을 하나하나 맛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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