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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Mar 07. 2024

다음 단계의 잡초

열 평 남짓한 밭을 가진 첫 해 봄에 나는 허브를 키우고 싶었다.

어릴 때 자주 듣던 '사이먼&가펑클'의 노래 '스카보로 페어'에 나오는 파슬리, 세이지, 로즈메리, 타임. 그리고 오레가노, 레몬밤, 팬넬, 딜, 라벤더, 민트까지 여러 종류의 씨앗을 사다가 밭에 듬뿍 뿌리고는 땅에서 어떤 모양으로 싹이 올라오게 되는지 사뭇 궁금했으므로 틈만 나면 쪼그려 앉아서 싹이 나오는 모양들을 들여다보곤 했다.

씨앗을 뿌린 자리에 쑥쑥 올라오는 싹들이 무척이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그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쑥쑥 자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내가 심고 기다리는 것들이 아니었다. 내가 씨앗을 심은 자리에 등장해서 내가 기다리는 것보다 먼저 자라서 내가 기다리는 것들을 기어이 못 자라게 하는 것들을 통칭해서 '잡초'라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한 철이 지났다. 봄 한 철이 지났다는 건 그 해에 심을 봄 작물들을 놓쳐버렸다는 뜻이다.


다음 해에는 내가 씨앗을 뿌린 자리에 재빨리 터를 잡고 올라오는 그것들을 죄다 뽑아내리라 다짐을 하고 그 잡초들 각각의 얼굴을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삼 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텃밭에 심지 않아도 싹이 터서 푸릇푸릇 올라오는 아이들이 씀바귀인지 좀씀바귀인지 고들빼기인지 명아주인지 정도는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텃밭에 씨앗을 심기 위해 제일 먼저 할 일은 자리 잡고 있던 풀들을 뽑아내는 일이다. 쑥, 명아주, 왕고들빼기, 까마중같이 제법 굵은 줄기를 가진 풀들을 뽑아서 밭 한 구석에 던져두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나면 기다리는 싹은 좀처럼 나오려 하지도 않는데 그 와중에도 구석에 버려둔 풀들이 버려진 곳에서 다시 뿌리를 내려 꼿꼿하니 살아나 자라곤 했다.  


초대하지 않은 그 잡초들을 제거하는 일이 밭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이 되었던 첫 해를 보냈다.


두 번째 해가 되었을 때 작년에 뽑아낸 쑥, 왕고들빼기, 명아주, 까마중은 거의 보이지 않았는데 그것들이 있던 자리에는 그것들보단 약간 키가 작은 고마리, 바랭이, 강아지풀, 방동사니 같은 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심지 않아도 피는 노란 코스모스와 달맞이꽃은 한편으로는 반가운 마음이 생기기도 했지만 이내 뿌리와 몸집을 키워서 내 작은 밭의 여백을 몽땅 채워버릴 기세로 자라는 그 풀들은 한여름에는 한나절만에 키를 쑤욱 올려서 내가 심은 작물들의 해를 가렸고 양분을 가져가는 것도 모자라서 풀 사이로 각양각색의 벌레들을 숨겨주곤 했다.

그래서 둘째 해는 잔디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그 풀들을 뽑아내느라고 또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겨울이 가고 세 번째 봄이 되었다.

이제 정말로 잡초 없는 밭에서 작물들이 잘 자라기만 기다리면서 키우고 싶던 허브 모종을 사서 밭에 옮겨 심었다.

잡초는 끝이 없었다. 아니, 진행형이다. 잡초는 끝이 없다. 끝을 모른다.

이제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을 가진 작디작은 풀들이 깨알처럼 박혀서 땅바닥에 붙어서 자라기 시작했다. 민들레와 제비꽃과 좀씀바귀는 그나마 큰 편에 속한다. 누운 주름풀, 벼룩이자리, 벼룩나물, 아불식초...

허브가 자라는 밭에 허브에 바짝 붙어서 촘촘하게 세력을 넓혀가는 그 작은 풀들은 뽑아내기도 어렵고 약을 써서 못 자라게 할 수도 없었다.

그러니 철쭉 그늘 아래 자라는 제비꽃은 그냥 내버려 두고, 흙이 흘러내리는 기슭에 있는 좀씀바귀도 그냥 내버려 두고, 작물을 심지 않는 구석에서 자라는 키 작은 민들레도 노랑꽃 보기를 기다리며 그냥 내버려 두고 어지간히 키 작은 풀들은 어차피 내가 키우는 식물에 해를 주지 못하니 다른 잡초를 막아주는 기특한 아이들로 여기며 그냥 지내기로 했다.  잔디밭의 바랭이풀과 방동사니는 키가 클 때를 기다려 비 오는 날 쑥 뽑아버리는 쉬운 방법을 찾았다.


작물 하나를 키우기 위해 잡초를 제거하다 보면 숨어 있던 다음 단계의 잡초들이 나타난다.

키가 큰 풀들만 없애면 될 것 같아도 그 키 큰 풀들이 사라지면 그것 때문에 싹을 틔우지 못하고 땅에 숨어있던 다음 단계의 풀들이 세력을 펼친다. 다음 단계의 풀들을 없애버린다 해도 또 숨어있는 그다음 단계의 잡초들이 얼마든지 얼굴을 내밀곤 하니 마음먹는 대로 잡초를 막는 일은 불가능하다.


작물을 심고 싶은 곳에 퇴비와 각종 유기물로 땅을 기름지게 하고, 제초매트며 방초매트를 깔고 비닐 멀칭을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다고 한다. 열 평 남짓의 작은 밭에 관상용의 화초를 키우기 위해 제초매트를 까는 것도 그다지 좋은 방법 같지 않으니 내가 심은 작물에 최대한 피해를 주지 않는 작은 풀들을 그냥 내버려 두면서 그동안 얼굴을 익힌 키 큰 풀들의 싹을 보이는 대로 뽑아주며 새 봄의 텃밭 놀이를 준비하고 있다.


밭작물을 키우는 데 잡초 관리만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시기마다 나타나는 병해충들도 그때그때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작물들은 온통 벌레와 잡초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이른 봄 마을에서 공동구입해서 나누어주는 퇴비와 유박으로 땅심을 한껏 돋구어도 화학비료와 농약 약간의 힘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내 밭에 화학비료와 농약을 주지 않으려고도 해 보았지만 그러다보니 저절로  작은 안전지대가 된 내 작은 밭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생기있게 튀어나오는 벌레들을 보면서 그냥 마음을 접었다. 발달한 농업기술의 힘 약간만 더하면 그럭저럭 내가 원하는 허브들의 꽃과 잎을 수확할 수 있으니까.


벌써부터 내 마음에는 싱그러운 딜의 잎으로 만든 스프레드와, 살구청에 보리지꽃을 올려 얼린 얼음을 띄운 음료 한 잔과, 방아잎을 따서 부친 고추장떡 한 장과, 푸른빛이 미처 사라지지 않은 풋토마토 튀김, 당귀꽃 비빔밤, 들깨꽃 튀김, 영글기 전 고수씨앗이 가지고 있는 소박한 풍미가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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