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안말 통신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 지 May 27. 2024

비가 온 뒤 흙과 바람과 풀과 생명들과

이른 봄 집 안 창가에 서서 코앞의 산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풀도 꽃도 아직 없는 산자락에 작은 새소리 말고는 어느 소리도 들리 않는 한 낮이었다.

갑자기 작고 빠른 네 발 생명체 한 마리가 산자락 한 귀퉁이에서 나타나서는 낮게 두른 울타리 주변을 날랜 몸짓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며 분주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누르스름한 털, 약간 긴 꼬리, 산고양이라고 하기엔 조금 사나운 듯 보이는 눈과 입, 상대적으로 보드라워 보이는 귀. 어쩐지 길게 보이는 허리와 올망졸망한 꼬리털 뭉치.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내 머릿속에서 '족제비'라는 검색 결과가  나왔다.

휴대폰 카메라를 작동시키려다가 움직임이 감지되면 촬영을 시작하는 CCTV가 눈에 들어왔다. 이 기계가 저 움직임을 제대로 담고 있을 테니 난 잠시 후 저장된 동영상을 꺼내기만 하면 될 것 같아서 조용히 족제비가 눈앞에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만 있었다.


족제비가 산 아래 바위틈으로 사라져 간 뒤 휴대폰을 열어서 CCTV의 저장 영상을 확인하려던 나는 적잖이 실망스러워졌다. 바람이 부는 것도, 내가 뜰 앞에 나가 풀을 뽑는 것도, 강한 햇빛의 움직임과 빛반사도 죄다 움직이는 것으로 감지해서 저장해 놓는 카메라인데, 눈앞에서 한참을 재롱부리다 사라진 족제비의 움직임은 하나도 저장되어있지 않은 이었다.


과연 족제비였다. 날래고 잽싸게 눈앞에서 움직이다 사라졌는데 흔적이 없는.


잠깐은 실망감이 들긴 했지만 저 낮은 산 자락에 내가 모르던 생명체들이 저렇게 재빠르게 생명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어 왔을 것이라는 새삼스러운 발견은  반갑기도 했다.


이 지나간 흔적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땅의 구멍은 의외로 두더지였다. 이른 봄 구입해서 심은 차수국 여섯 뿌리 중 무려 세 뿌리를 죽게 만든 아이들. 구멍이 보일 때마다 흙을 밀어 넣어 꾹꾹 다져보지만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다시 구멍을 만들어놓곤 한다.


내가 그 아이들과 눈 마주치지 않으며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 아이들도 나와 마주치지 않으며 살아가려 한다. 그저 먹이를 찾아 오가는 중 가끔 들켜버릴 뿐이다.


여기 있는 날이면 한 두 차례 마당을 돌며 잡초를 고 물러진 흙을 발로 밟아서 땅을 다지고는 하면서 자꾸 나는 내가 지나는 길의 흔적을 이 아이들에게 알리려 한다.


땅벌, 지네, 뱀, 하늘소, 지렁이, 달팽이, 두더지, 개구리,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수많은 아이들은 의도를 가지고 나를 공격해오지는 않는다. 단지 내가 나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먼저 이들의 터전을 건드리게 된 까닭으로 가끔 이 아이들이 미처 감추지 못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을 때  오히려 내가 이 아이들을 향해 조금 과도한 공포심을 가지고 대하는 것뿐이다.


생각보다 공격력이 없는 아이들이 살기 위해 최대치의 방어력을 행사할 뿐이고 나는 그저 내가 끌어낼 수 있는 최소치의 방어력으로 이 아이들을 쫓아내고 있다.


나지막한 산 밑에 지천으로 올라오는 풀잎들  사이로 어떤 위험한 것들이 숨어있는지 몰라서 위협을 느꼈던 내가 봄이 되기 전에 그 풀들을 막기 위해 한 일은 눈이 쌓인 어느 겨울 낮에 그 숲길에 쌓인  위로 제초제 한 주먹을 뿌린 이었다.


작년 이맘때 보이던 키 큰 풀들은 제초제를 뿌린 영역 밖으로 물러나서 자라고 있다. 비어있던 맨 땅 위새 풀씨들이 날아왔는지 봄비가 내리자마자 거기엔 새 풀들의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지만 비가 온 다음날 포슬포슬 물러진 흙 위를 훑고 지나가면서 장화를 신은 발로 흙을 한 번 뒤집어주기만 하면 한 열흘 정도의 시야는 다시 확보가 된다.


잎에 병이 들어 시들어가는 식물들 주변으로  가루약 한 움큼을 던져두면 다음날 말끔하니 건강한 새 잎이 올라오곤 하니 땅벌레와 병해충도 그저 그렇게 흘려보내버릴 수가 있다.


산새들의 소리, 벌들의 소리. 조용히 낮은 몸으로 오가는 고양이들의 소리.


이제 조금 지나면 이 공간으로 모기가 들끓게 될 테니 바로 지금 이때뿐인 풀멍의 시간.

캠핑의자에 앉아 선선한 봄바람과 찬란한 햇살과 새 잎을 올리느라 한없이 분주한 풀과 꽃과 나무들 틈에 앉아 봄날의 오전 한 때와 또 봄날의 오후 한 때를 보낸다.


구십 살의 부모님과 서른 살의 아들 딸을 생각하면서  그 세월의 중간을 지나는 내가 가는 시간과 오는 시간의 봄을 지난다.


이른 아침 텃밭. 간밤에 내린 빗방울을 말끔하니 올리고 있는 상추 이파리가 더없이 곱다.









매거진의 이전글 다음 단계의 잡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