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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Apr 01. 2022

시어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암수술 후 10년 동안 작은 며느리와 함께 지내시던 시어머니께서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기신 지 두 달만에 낙상으로 치료를 받으시다가 코로나 확진으로 끝내 세상을 등지셨다. 면회도 허락되지 않는 쓸쓸한 병상에서 얼마나 두려우셨을지 마음이 한없이 아리다.


사이 좋은 고부관계는 아니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지낸 20여 년이 지날 즈음 결국 내쪽에서 먼저 손을 놓았다. 힘들게 시작한 인연 놓기였지만 차라리 왕래를 안 하는 것이 서로를 위해 더 나은 일이었다고 여겼다.


성격이 운명이라고 한다.

대학교 다닐 때, 엄마가 시주 스님 한 분을 집 안으로 들어오라 하셔서는 내 손금을 보아달라 청하신 일이 있었다. 여러 가지 말을 들었는데 그중 '늦게 결혼해라. 그래야 좋은 시어머니를 만날 수 있다'는 말도 있었다.

집을 사느라 옷과 가방을 포기한 것을 야단치는 분의 기분을 맞춰드리는 일을 포기하는 것이 내 성격이었으니 시어머니와 불화하는 운명이 맞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시어머니께서 돌아가신대도 가지 않을 거라고 공언을 했었지만, 이제 세상사 내 맘대로 사는 게 철부지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도 되었으므로 직장 첫 출근일이었던 아들의 퇴근을 기다려 조금 늦게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내가 반가울 리 없는 시댁 식구들이었겠으나 늦은 참석에도 조용히 자리를 마련해주고 환대를 해 주었다. 그저 고생 많이 하셨고, 미안했다는 말 밖에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정 사진 속의 시어머니는 평생 그러하셨듯 고운 표정으로 고운 옷과 고운 모자를 쓰고 웃고 계셨다.

돌아가신다 해도 눈물이 날 것 같지 않다고 난 자주 생각했었는데, 눈물은 내 마음과 달랐다.


내가 시어머니의 미움을 받으며 출근 해서 하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내가 멈추어버리는 지점은 어디쯤일까....




'메인스트림'

주로 사회문화의 주류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 이 단어는 1980년대 특수교육 전공 수업에서도 강조되던 말이었다.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지어야 하는 사회적 배경을 받아들이되, 비록 장애가 있는 사람이더라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사회의 주가 되는 흐름에 섞여 함께 흐르게 하자. 이때 함께 거론되는 단어는 '제한된 환경의 극소화'였다. 장애인을 시설이나 병원에 분리시키는 일은 최소화하고, 가능한 범위 안에서 일반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일. 그래서 그 배경 지식을 갖추고 90년대 특수교육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된 내 또래의 특수교육 전공자들은 장애학생이 학교 생활에 적응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학교의 주된 흐름을 살펴보는 일이 되었다. 메인이 되는 흐름을 파악하고 거기에 섞여 함께 흐르게 하는 일. 학교 등하교, 학급 시간표에 따라 일과를 보내는 일, 담임선생님과 학급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에 필요한 일생 생활 기능과 기초적인 의사소통 기능을 익히도록 돕는 일이 주가 되었다.


 '삶의 질 향상'

1990년대 특수교육 전공자들은 장애인의 삶의 차원도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서 보다 나은 삶을 향유하는 일에 대한 방법을 모색하는 일로 시야를 확대시켜서 현장에 들어왔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는 성장기에 진입한 사회에서 응당 있어야 할 움직임이었다.

장애인들이 사회의 메인스트림에 어울려 흐르며 보다 나은 삶을 향유하고자 하는 움직임 곳곳에 엄청난, 때로는 순박한 차별이 있었다. 힘들게 밖으로 나와 거친 세상에서 다치는 일 없이 잘 제공된 시설에서 편히 지내는 일이 훨씬 나은 것 아니냐 하는 온건주의 시각도 사회 구성원의 일부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상처가 되기는 마찬가지였다.


'완전 통합'

 2000년대에 이르러 '장애인 차별 금지법'이 제정되었다. 어떤 이유로든 장애를 이유로 차별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물리적으로 격리되지 않은 환경에서 장애를 가진 학생 한 명 한 명의 적응을 돕기 위해 필요한 내용을 포함하는 '개별화교육프로그램'이 특수교육의 주된 교육활동이 되었다.

시각, 청각, 신체, 지능, 언어, 정서 영역에서의 발달이 상당히 지체되어 교육적으로 특별한 지원이 요구되는 학령기의 학생들이 학교 생활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은 모두 다 다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도록 혼자서 화장실 이용하는 일도 힘든 지적 장애 학생과, 함수와 확률 계산을 척척 해 내는 지체부자유 학생이 함께 특수학급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서 나 혼자 두 학생 개개인의 교육적 요구를 맞추어주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불가능'에 초점을 두지 말고 '가능'에 초점을 두라고 선배들이 나를 다독여주었다.


'불가능'에 초점을 두면 나중에 '가능'이 보였고, '가능'에 초점을 두면 나중에 '불가능'이 보였다.

자주 허우적거렸다. 그것도 내 성격이었다.   


직업이었던 장애학생을 돕는 일.

한 가족이 된 시어머니와 화목하게 지내는 일.

치매에 걸린 친정 엄마와 함께 사는 일.

내가 하려다가 멈추고 만 일다.


사람이 사람과 엮여 살면서 물처럼 한데 모여 흐르는 일이 나에겐 왜 이리 어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타파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폐허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하는지 그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그리스인 조르바 중에서)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

그런 고백을 또 다시 반복하

주섬주섬 마음을 가다듬는다.


어머니!

고생 많으셨습니다.

편안한 안식을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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