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칸방에 둘러앉아 옛이야기를 나누다가 복달임 식사를 하러 시내 식당에 다녀오는 게 전부인 시간 보내기였지만 아버지와 언니는 여느 호텔보다 편안하고 시원하게 휴가를 보낸다고 좋아하셨다.
단칸방에서 지내던 어릴 적처럼 깊은 잠을 자고 있던 토요일 새벽에 언니가 낮은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며 밖으로 나가는 소리에 잠을 깼다. 비 내리는 여름 새벽 네시 반. 바깥은 어두웠다.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언니가 아버지에게 얼른 전화를 해 보라고 했다. 네 시에 나가시는 걸 봤는데 집 마당에는 안 계신다고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이었다. 급히 아버지 번호로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벨이 방 한쪽 구석에서 울렸다. 전화기도 안 가지고 나가신 것이었다.
아버지는 지인들의 전화번호를 하나하나 기억하시고 필요한 전화는 번호를 눌러가며 통화를 하시는 분이시다. 아마도 바깥 어딘가에서 길을 잃으셨다고 해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전화기를 빌려 전화를 하실 분이니 기다려 보자고 언니에게 말하면서 마을 구석구석을 돌아다녀보았다. 마을과 통하는 등산로 입구까지 올라가 보고, 마트로 향하는 마을 길을 돌아보면서 한 시간쯤이 흘렀다. 가끔 개 한 마리와 동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시는 어르신을 만나기도 했지만 아버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제법 먼 길을 나가셔서 길을 잃으신 것 같고 어쩌면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지셨을지도 모를 일이기에 차를 끌고 동네를 돌아보기 시작했다. 마을 큰길로 나갈 때 이른 새벽 동이 트기 시작했다. 넓은 도로변 마트와 파출소, 소방서, 학교 앞에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큰길을 한 바퀴 돌고 버스 정류장과 통하는 마을 길로 들어서는데 바쁘게 출근을 하는 젊은 여성의 옆모습이 보였다. 차가 올라갈 수 있는 골목 끝까지 올라갔다가 차를 돌려서 천천히 다음 골목을 향해 가려고 왔던 길로 내려갈 때 우산을 들고 내 차를 향해 꼿꼿하게 걸어오시는 아버지의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난 차의 창문을 열어 아버지를 불렀고, 아버지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 환하게 웃으시며 조수석 문을 열고 차에 오르셨다. 집에서 걱정하고 있을 언니에게 아버지를 만나서 가고 있다고 전화를 하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버지는 잠이 든 우리를 깨울까 조심하며 새벽 마을길을 산책 삼아 걸으시다가 그만 돌아가는 길을 잃으셨다고 했다. 이른 시간이라 바깥에 나오는 사람도 없었기에 천천히 걸으시면서 집을 찾아보리라 생각하셨는데 집에서 보이던 교회와 식당 앞에서도 서너 개의 갈림길 가운데 우리 집으로 오는 골목을 찾지 못하시고 여기까지 한참을 오게 되셨다고 머쓱하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마침 한 집에서 나오는 젊은 아가씨에게 사정을 말하고 전화기를 빌려볼까 했으나 아마도 출근하느라 바쁜 그의 모습에 그냥 말 걸기를 포기하고 길을 걸으시는데, 흰 차 한 대가 골목으로 올라갔다가 돌려서 나오는 걸 보고는 어쩌면 내 차일지도 모른다 싶어서 다가오셨다고 했다. 아버지도 웃고, 나도 웃었다.
집에 돌아와 언니에게도 당신이 새벽에 두 시간을 걸으셨다고, 십 년 만에 제일 많이 걸어 본 거라 말씀하셨고 새벽부터 아버지를 찾아다니던 언니는 아버지가 아직도 젊은 줄 아느냐, 아버지가 자신을 너무 믿는다 놀리며 한바탕 웃었다.
젊었을 적 아버지는 무척 화급하신 성품이셨다. 술도 많이 드셨고, 우리 삼 남매와 엄마를 무척 엄하게 대하셨다. 엄마는 고분고분하지 않으셨기에 자주 큰 부부싸움으로 번졌다. 우리는 가능하면 아버지와 같은 공간에 있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아버지는 가족들과 대화가 단절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내시면서 너무너무 섭섭해하셨다. 나도 동생도 그게 마땅하다 생각하며 아버지와 형식적인 대화만 하며 지냈었다.
학교에 근무하던 어느 해 3월, 새로 부임을 오신 교장선생님 앞으로 많은 수의 축하 난이 배달되었다. 크고 예쁜 난 화분이 교장실과 교장실 앞 복도에 줄지어있었는데, 두 명의 학생이 지나가다가 실수로 그중 하나를 깼다. 와장창 소리가 커다랗게 복도를 울렸고 화분을 깨뜨린 아이가 사색이 되어 걸음을 멈추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난 그때까지 잊고 있었던 낯선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잘못한 일이 있으면 당장 벼락같은 호통으로 야단을 맞으며 자랐다고 생각했었다. 어릴 적 대식구가 모여 저녁 식사를 마친 어느 날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서 엄마와 이모들과 함께 설거지를 할 때였다. 사기그릇 하나가 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여져서 와장창 하는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났다. 아버지가 마루에서 커다란 소리로 나를 향해 말씀하셨다. 난 야단을 맞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담겨있는 말의 내용은 전혀 달랐다.
"그릇 깼냐? 너 안 다쳤지? 안 다쳤으면 됐다."
옆에 있던 행정실에서 청소도구를 빌려다가 아이와 함께 화분 조각을 치우고 그 아이들을 교실로 올려 보내면서 나도 똑같은 말을 했다.
"너, 안 다쳤으면 됐지, 화분 깨진 거 아무 일도 아니야!"
반쯤 열린 교장실 문 안쪽으로 처음부터 마무리될 때까지의 모든 소리가 하나도 빠지지 않고 들어가고 있었다. 그날 그 시간후로 교장실 앞에 있던 화분들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투명하게 사라졌다.
언니도 나도 아버지도 그날 새벽의 당황했던 순간들을 그렇게 투명하게 흘려보냈다.
언니도 나도 동생도 각자의 가정을 꾸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내 엄마와 아버지와그다지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하며 지내왔으므로 이젠 자랑스러움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많은 순간들이 많았음을 고백하지 않아도 서로에게 들켜버리곤 한다.
아버지와 엄마가 당신들 부모님과의 기억에 다가가며 용서하고 화해하는 시간으로 당신들의 노년의 때를 채우고 계신 것처럼 우리 또한 철없던 젊은 시절에 부모님을 향해 던졌던 원망을 떠올리면서 우리 아들과 딸들에 대해 서툴렀던 면면들에 대해 미안해하고 그럼에도 잘 자라 준 모습에 대견해하는 중년을 보내가며 부모님을 읽는다.
잘못도 실수도 원망도 그렇게 흘려보내 본다.아무리 생각해도 부모님께는 받은 것만 있는 인생이니까.
폭우가 훑고 지나간 곳곳에 걱정스러운 소식들이 전해졌기에 이곳저곳 안부를 물어야 했다.
안말에도 많은 비가 지나갔을 테지만 내가 들렀을 땐 약간의 토사가 밀려내려온 뒤뜰 말고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다.
상수관 뚜껑이 열리고 보호통이 빗물에 떠올랐었나보다. 마을 어르신께서 비가 그친 뒤 다시 곱게 닫아주셨다. 조용한 마을의 빈 집이지만 마주칠 때마다 안부를 물어주시고, 무성하게 자란 집 앞 돌계단의 풀도 깎아주시며 무심한 듯 신경 써 주시는 이웃들이 고맙기만 하다.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흐를 것이고, 마침내 가을날이 오면 나는 또다시 '지난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하는 릴케의 시를 읊조리게 될 것이다. 여전히 진행 중인 이 여름, 남국의 날이 남아있는 이 위대한 여름의장면을 떠올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