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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Aug 09. 2022

그해 여름

1984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을 보낼 때 같은 반 문학도로부터 한 모임에 초대를 받았었다.

겨울에 고등학교 졸업생들의 시화전을 열어보자는 취지의 모임이었는데 당시 내가 살던 지역의 모든 고등학교에서 서너 명씩의 학교 대표를 모아서 준비위원회를 꾸리고 있다고 했다.


졸업 시화전 준비를 위한 발기위원회 창단식 같은 생소한 모임을 시작으로 몇 차례 협의회가 있었다. 그 시절 유행하던 다방에서 커피:프림:설탕을 둘:둘:둘의 황금비율로 맛있게 타 오라며 다방 레지에게 주문하는 어른 흉내를 내며 깔깔거리다가 학생들 생활 단속을 나온 고등학교 선생님에게 들켜서 야단을 맞은 적도 있었다. 졸업 시화전을 준비하는 고3 학생들이라고 밝힌 우리들에게 그 선생님은 자신도 '작가'라며 열심히 해 보라는 충고를 주시곤 그냥 풀어주셨다.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르는 음악다방에서 '모두 다 사랑이에요'를 부르는 친구의 노래에 박수를 쳐 주기도 했지만,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다 들켜도 혼이 나는 학생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없었으므로 그저 꼭 거기까지만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아, 한 가지 기억이 더 있다. 시화전에 내놓을 작품을 제출하고 작품에 대한 협의를 하는 중에 두 명의 친구가 자신들의 선배가 내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그들이 안내한 공간으로 갔을 때 하얗고 말간 얼굴에 '지식인'의 향기가 흐르는 한 사람이 유약해 보이지만 차갑고 강단 있게 의자에 앉아있었다. 주변의 작은 공간에 그 선배를 무척 존경하는 듯한 열서너 명의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나와 그 선배의 만남을 관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김수영 시인의 '풀'을 화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부조리한 정치 현실과 아래로부터의 혁명이 마침내는 민초들의 삶을 바꾸어내기까지 지식인의 사명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하여. 장차 대학 공부를 마치고 사회에 나가게 될 젊은 지식인의 사명에 대하여.

나중에 이해하게 된 그 공간은 '의식화'교육을 하는 공간이었었지만 그런 교육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가만 듣다가 말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이란 말에는 찬성한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인들이 바로 그 '아래'에 있다가  '위'로 올라간 사람들 아닌가? 그 '위'로 간 사람들이 버리고야 마는 것들을 여전히 '아래'에서 '혁명'해야 하는 반복이라면 난 찬성할 수 없다"

그의 얼굴은 더 하얗게 되었고, 입술은 차갑게 다물어졌다. 인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데리고 갔던 친구들과 그 공간을 나왔고, 그 친구 중 한 명이 일부는 내 생각에 찬성을 한다고 말해 주었던 것도 같다.


난 미대 진학을 준비 중인 같은 반 친구에게 내 시에 맞는 그림을 부탁했다. 치기 어린 어두운 시어들을 나열해 써 내려간 나의 시화 판넬은 그즈음 막 문을 연 시청 문화원 전시공간에 50여 점의 다른 작품들과 함께 전시되었다. 내 작품이 그 전시작들 중 베스트 3 순위 안에 든다며 극찬을 해 주는 사람과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졸업과 동시에 대학으로 직장으로 각자의 진로를 찾아 뿔뿔이 흩어진 나의 동갑내기 문학청년들 소식을 가끔 듣기는 했지만 워낙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 나의 성격은 그 시절의 '졸업 시화전'을 그렇게 한 때의 추억으로만 남겨 놓고 있었다.


나에게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강론하던 그 선배의 소식은 매스컴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미대생들이 소망하는 대학을 졸업한 그분은 커다란 히트작은 아니지만 나름 이름을 알린 문제작을 만든 영화감독이 되어있었다.


그 때로부터 서른 해가 훌쩍 지난 몇 해 전에 그중 한 그룹의 친구들을 잠시 만났다.

캐나다에서 필리핀에서 종로에서 각자의 삶의 길을 지나고 있는 사람들이 만나 30년 전의 얼굴을 하고 중년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시절 추억 속의 사람들을 짧게 만나고 길게 되새기면서 내가 자꾸 관심을 기울여 찾고 있는 것은 두고 온 나의 모습이었다.


그 친구들의 시를 그때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친구들도 나의 시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린 존재하고 있지만 굳이 꺼내어 확인하고 싶지 않은 서툴기 짝이 없던 서로의 시에 대해서는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일처럼 덮어둔 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갑작스러운 계기로 가까워졌다가 별다른 이별 인사 같은 것도 없이 흩어져 각자의 시간을 살아온 사람들이  때를 떠올리는 시절 인연으로 만나 술 한잔을 기울였고, 또다시 이별 인사 같은 것 없이 흩어져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갔다.


언젠가 어디선가 또다시 그들을 만난 대도 엊그제 만났던 친구들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눌 것이고, 또다시 만날 약속 같은 건 없어도 내일 다시 만날 사람처럼 인사하며 헤어질 것이다.





그 시절 우울했던 내 시의 마지막 소절은 꼭 그 시절 고 3들의 초상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귀하게 태어나서는

아무렇게나 인생을 살다가

멸시 속에 잊혀간 한 사람이 부르다 흘리고 간 노래 한 소절.

안녕, 니체!

신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죽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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