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 지 Aug 05. 2022

아버지의 안경

나이도 먹는 거라면, 지금은 미디엄 웰던

퇴직하기 전까지는 방학 때가 되어야 시골과 도시에 따로 살고 계시는 아버지와 엄마를 각각 찾아뵙는 일이 수월했었다.

불화하는 노년의 부부는 정말로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자식들에게 당신들의 일상을 의논하는 일 같은 것은 하지 않으려고 하셨기에 은행, 병원, 시장보기 같은 일을 당신들 스스로 천천히 처리하며 지내고 계셨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재작년 가을에 아버지를 잠시 찾아뵈었을 때 아버지는 눈물이 나고 눈이 침침해 안경을 하나 맞추셨는데 궁금해서 물어볼 것이 있다며 안경 케이스에 든 안경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셨다.

"동네 안경원에 가서 안경사한테 눈이 침침한데 안경을 쓰면 괜찮아지는지 물었는데, 안경을 오만 원에 해 주겠다고 병원에 가서 눈 검사를 받고 오라더라. 병원에 가서 눈 검사를 하고 받은 검사표를 그 안경사에게 주고 안경을 맞추는데, 그 사람이 '안경다리는 어쩔 거냐?' 묻더니 이만 원을 더 내라고 하더라. 그래서 칠만 원을 주고 왔는데, 래 안경다리 값 따로 받는 거냐? 내가 안경을 생전 처음 맞춰봐서 뭘 알아야지. 노인회관 같이 다니는 친구가 내 안경을 보더니, 자기 다니는데서 이만 원이면 맞출 수 있는 걸 칠만 원이나 주었느냐고 놀리더라."


"아버지 바가지 쓰셨네!" 하고 장난하듯 넘기는 말을 하며 안경 케이스적혀있는 안경원 이름을 기억하면서 안경원이 있는 위치를 여쭤보았다. 카드로 했는지 물었더니 현금을 냈다 하시고 남자 안경사였냐 물으니 여자 안경사라고 하셨다.


아버지랑 수다를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안경 케이스에 적혀있던 안경원엘 갔다.

마스크를 쓰고, 휴대폰 녹음 버튼을 눌러 가방에 넣어두고 안경원에 들어갔을 때 젊은 부부가 안경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대화 내용으로는 어떤 모임을 통해  얼굴을 익힌 친분관계의 사람들 같았다.


나는 아버지 안경과 비슷한 안경이 진열된 진열대에서 안경을 보고 있었다. 00 안경원 000, 00시 안경협회장 000 라고 적힌 명함 세 가지가 진열대 위에 올려있었고 난 그 명함을 하나하나 챙겨서 가방에 넣었다. 홀리한 이름의 안경원에 홀리한 이름의 안경사였다.


손님들과 안경사의 대화가 멈추면서 부부가 안경 진열대를 둘러보기 시작했을 때 안경사가 나에게 다가와 '안경을 하시려느냐' 물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안경을 하나 해 드리고 싶은데, 연세 드신 분들이 편하게 선택하시는 안경과 가격대를 알고 싶다고 물었다. 그녀는 내가 보고 있던 진열대의 안경을 가리키며 이것들은 삼만 원, 오만 원인데 가격대는 더 싼 것도 있고 더 좋은 것도 있으니 고르기 나름이라 말했다. 그리고 "부담스러운 가격이시라면, 원하는 가격을 말씀하시면 맞추어 드릴 수도 있어요"

는 말도 덧붙였다.


울컥 화가 올라온 나는 그녀가 모르게 녹음 중인 내 휴대폰에 신경을 쓰면서

"그런데 왜 내 아버지한테는 칠만 원을 받으셨느냐?"

하고 말 했다. 내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안경사가 의아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한 달 전 노인 한 분에게 오만 원에 안경을 해 드리겠으니 병원에 가서 눈 검사를 하고 오라 하고는 그분이 가져오신 검사표를 받아 안경을 만들어주면서 안경다리 값 이만 원을 다시 받으시지 않았느냐?"

하고 나는 상기된 눈과 목소리로 말을 했다.

잠시 눈이 흔들리던 안경사가 말했다.

"아니, 기가 막혀서 내가. 무슨 안경다리 값을, 응? 내가 하나에 만원씩 이만 원을 받아요? 여기 CCTV 녹화되는 데예요, 내가 손님한테 그런 일을 할 수가 없는 데예요"

"CCTV에 소리도 녹음되나요?"

하고 묻는 내 말에 안경사가 눈을 더 똥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니요. 소리는 녹음 안돼요. 그리고 원래 안경테 값 따로 받는 거예요. 안경다리 값이라니 아버님이 이해를 못 하신 거예요. 그렇죠? 원래 안경테 값 따로 받는 거죠?"

그녀가 안경을 고르고 있는 남자에게 동의를 구하는 말을 하며 시선을 돌렸을 때, 그 남자는 천천히 뒷짐을 지며  뒤로 돌아섰다. 그의 아내는 나와 안경사의 실랑이를 곁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이런저런 세상살이 통밥으로 익히 미루어 짐작한 대로 안경사의 답은 아버님이 이상하신 거다. 말도 안 되는 말 하는 당신 정신이 이상해 보인다. 그런 70년대 시장거리에서 듣던 싸움꾼들의 단어에서 한점도 안 벗어나는 말을 했다.

"신용카드로 결제를 했으면 7만 원 결제 내역이라도 확인할 수 있을 텐데 현금을 내셨다고 하시니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거 나도 잘 안다. 내가 여기에 화내러 온 것도, 따지러 온 것도, 돈 돌려받으러 온 것도 아니고 00 안경원 000 씨 얼굴 좀 보고 려고 들렀다"

라고 말했다.

"네, 제 얼굴이에요. 잘 보세요!" 그녀가 자기 얼굴을 내 얼굴 앞으로 살짝 밀었다.

"내가 안경을 쓴 지 삼십 년이 넘었다. 안경다리 값은커녕 안경테 값 따로 받는 동네 안경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여기는 안경 맞추면 안경다리 값을 따로 받는데라는 걸 어딘가에 알려 놓아야 우리 아버지 같은 분들이 당황하지 않을 것 아니냐?"

 큰소리로 말하며 나는 안경원을 나왔다.

"어머, 어머, 정신 이상한 사람이야 진짜. 내가 안경원 한지 20년이네요!"

그녀가 내 뒷머리에 소리를 질렀다.


그녀가 사회복지사도 아니고, 추레한 노인네에게 처음부터 바가지를 씌우려 한 것도 아니라는 것은 안다. 어찌어찌하다 보니 그리 긁으면 그렇게 돈 내놓는 양반이라는 걸 알게 된 그녀만의 노련한 후각을 탓할 생각도 없었다. '정신 이상해 보여요' 하는 닳고 닳아 너덜너덜해진 표현도 그래서 그냥 흘러가다 덜그럭 소리를 내는 티끌 같기만 했다. (아니, 그 대화를 녹음하고 여러 번을 다시 돌려 들었으니 어쩌면 그녀의 말이 일부는 맞을지도 모르겠다)

단지 안타까운 건, 바가지를 씌워도 좀 세련된 말로 반박 불가하게 씌우지... 안경다리 값 이만 원... 이건 너무 얕잖아... 그런 말에 넘어간 아버지가 속상했고, 세상살이 서툰 늙으신 내 아버지가 젊은 안경사에게 받은 놀림이 속상했고, 조금 더 확대해서 그 안경사가 다시 사람들을 그런 식으로 놀리는 일을 그만두게 하고 싶다는 생각도 함께 있었다.


안경원을 나와서 차를 타러 가는 길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 나 그 안경사한테 가서 한바탕 했어요. 거기 손님으로 있던 두 사람이 내가 안경사한테 하는 말을 들었으니까 한 사람당 만원 씩, 딱 이만 원어치 망신을 주고 왔어요. 이제 그 안경사 다시는 그런 일 못하겠지요? "

아버지는 네가 정말로 그랬냐? 그랬다고? 여러 번 물으셨다. 난 덧붙였다.

"인터넷에 올리고, 녹음파일 풀고.. 그 안경원 망신 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까지만 할 거예요. 아버지도 그 안경원 다시는 가지 마셔요."

아버지는 오히려 나를 진정시키며, 당신이 안경다리 값을 따로 내는 건지 몰라서 물은 거지, 그 안경사 탓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며 웃어주셨다. 그 안경사가 나에게 '정신이 이상해 보인다' 했단 말은 하지 않았다. 그냥 그녀와 내가 하나씩 날린 훅이라고 넘기기로 했다.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하는 노래 가사를 보다가 문득 나이도 먹는 거라면, 지금의 나는 적당하게 익어가고 있는 '미디엄 웰던'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철 몰라 저지르던 실수도 다 보듬어주던 어른들이 많았던 설익은 '레어'했던 시기를 지낼 수 있었으므로 간혹 '내가 제대로 가고 있나?' 의심이 들'미디엄 레어'의 시기도 맞이하고 흘려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나 또한 언젠가는 누군가 나를 향해 던지는 의도적인 실수에 대해 그저 엷은 미소로 넘길 수 있게 제대로 익은 '웰던'의 시기를 맞이할 수 있게 되기도 하겠지만 지금은 나의 '레어' 했던 시기에 했던 실수들과 또 여전히 반복되는 미숙함들에 대해 미소를 지어주기로 한다.


삼 년의 시간이 지나 아버지는 새 안경을 하셨다.

홀리한 이름의 그 안경원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안경원 블로그에 올라온 그녀의 글에게도 미소를 지어준다.

작가의 이전글 낡은 잡지에서 만난 통속한 시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