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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Jul 31. 2022

낡은 잡지에서 만난 통속한 시간

 LIFE 지에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읽는 밤

통속.
1. 세상에 널리 통하는 일반적인 풍속.
2. 비전문적이고 대체로 저속하며 일반 대중에게 쉽게 통할 수 있는 일. (표준 국어사전)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를 애정 하던 때에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라든가 '페시미즘의 미래' 같은 낯선 느낌을 주는 단어가 좋았다.

'인생은 외롭지가 않고 거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에서 '통속'이란 말의 의미를 가치중립적인 것으로 놓을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비전문적이고 저속하다는 표현과, 일반 대중에게 쉽게 통할 수 있는 일이라는 표현 사이의 괴리감에 대해 고민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까지...


1963년 9월 27일 자 라이프지를 넘기며 익숙하지 않은 영어문장을 천천히 읽어보았다.

포드 자동차, 크라이슬러 닷지, 콜게이트 치약, 파커 만년필, 스카티 화장지, 캠벨 야채 캔, 켈로그 스페셜 케이, 코카콜라 같은 낯익은 회사의 광고들과 낯선 회사의 광고들이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사람을 달에 착륙시켰다가 지구로 무사히 돌아오게 한다는 아폴로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페이지에서는 우주 비행사들의 훈련 모습과 귀환 계획, 우주복과 장비들을 여러 장에 걸쳐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고 닐 암스트롱, 프랭크 보먼, 찰스 콘래드, 토마스 스태퍼드, 존 영, 그리고 영화 퍼스트 맨을 통해 알게 된 1967년 아폴로 1호의 사망자 에드워드 화이트의 가족사진과 이야기가 실려있다.


내가 이 책에서 오랫동안 보고 있는 페이지는 이 장면이다. 고등학교 졸업사진. 학창 시절의 즐거움과 괴로움, 그리고 단지 그 시간을 지내 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던 순간을 한 장 사진에 남기고 있는 젊디 젊은 청년들의 초상.

세월은 쏜살같이 흘렀으니, 서투르지만 빛나던 사람들의 젊은 시절은 이제 추억의 한 페이지로도 남아있기 힘들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새삼 그의 시를 다시 읊조린다.



목마 숙녀


              박인환

한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 별은  가슴에 가벼웁게 부서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목마를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개의 바위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낡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거늘
한탄할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통속한 낡은 잡지의 표지라면 이런 것이었겠다.  이젠 저 화려한 무대 의상과 퍼포먼스가 조명 속에 감추어둔 낡음을 눈치챌 수 있는 눈을 가진 내게는 서글픔도 함께 읽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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