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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 지 Jul 21. 2022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반 클라이번 콩쿠르의 임윤찬 연주를 보는 밤

마이마이 카세트 플레이어에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담아 품에 안고 다니며 듣던 시절이 있었다. 클래식 애호가는 아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음악 감상 시간에 들어보았던 곡들과 드라마나 CF 등의 미디어를 통해 잘 알려진 곡들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이다. 카라얀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 오케스트라와 바이센베르크의 피아노로 처음 접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길고 사연 많은 이야기를 구비구비 들려주다가 후반부의 클라이맥스를 지날 때쯤엔 '그래 그래 제법 괜찮은 인생이었어!' 하는 마무리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기차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남한강의 정취가 한눈에 들어오는 오후의 빈 교실에서, 잠 오지 않는 밤 자취방의 어둠 속에서 듣는 라흐마니노프는 그렇게 내 젊었던 시절의 가장 우아한 친구였다.


비 오는 밤 유튜브를 열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다는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연주 장면을 반복해서 보고 있다. 동화 속 주인공같은 열여덟 살 천재 소년의 아름다운 연주에 지휘자 마린 알솝이 어깨를 들썩이며 미소 짓고, 눈물을 닦고,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드는 마지막 장면까지 몇시간을 돌려가며 보고 있다.

움츠러들지도 서두르지도 과하지도 않으면서 예민하고 섬세하고 때론 격하게 지휘자와 눈빛을 나누어가며 오케스트라와 하모니를 이루어가는 피아니스트의 격정적인 동작에 빠져있다.

저 선율을 어떻게 저렇게 살려 낼 수 있을까? 두 손의 움직임만 보고 있어도 손가락 마디마디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선율들이 낱낱이 살아나서 공간을 휘젓고 있다. 매 순간순간이 화보 같은 영상과 어우러져서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다.


오케스트라 팀원이 모여 각자의 파트를 연주하다 보면 어느 날 불현듯 상대방의 연주에 담긴 숨결이 서로에게 닿으면서 서로에 대해 '너도, 품고 있는 사연이 많구나!' 하는 느낌을 심장 속에서부터 받아들이게 되는 찰나의 순간이 올 때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발달장애인 중에도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기교 부릴 생각조차 없이 정확하게 음계를 짚어가며 연주하는 한 자폐인의 피아노 연주곡을 들으며 참 맑고 깨끗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갈 것 같았다.


열여덟 살이라는 천재 피아니스트의 연주 속에 담겨 전해지는 메시지가 있을까? 살아온 이야기를 전해주기엔 너무 어린 나이인 데다가 실력이 천재적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감정 코드 같은 것은 재능에 묻혀져 보이지 않게 되는 건 아닐까? 하는 궁금함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메시지보다는 기교에 감탄하게 될 것이라 예상하며 연주를 보기 시작했으나 그런 나의 선입견은 한순간에 깨져버렸다.


잘 단련된 순수.

젊은 피아니스트는 스스로의 열정과 재능을 아낌없이 태워가며 단련해왔고 앞으로도 그런 시간을 지내게 될 거라는 약속을 내어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 모습은, 일찍이 내가 가져보지 않았던 그 순수한 열정의 모습은 도리어 나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게 만드는 나를 향한 거울이 되어있다.


몇 번을 반복해서 보아도 여전히 다시 보고 싶어지는 임윤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과 함께 새벽을 맞이해본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카라얀과 바이센베르크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영상도 찾아본다.

노장들의 노련한 연주도, 젊은 신예의 생기 넘치는 연주도 아름답기만 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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