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를 본 어느 날

by 라니 글을 피우다

나는 늘 얼굴에 표정이 없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이미 오래전에 마음은 죽어버린 사람처럼 살았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어도 아무런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 안에 남아 있는 건 공허함과 무기력뿐이었다.

그렇게 살아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버텨왔다.


나를 표현하고 싶었지만

단어가 내 안에서 자라지 않았다.

말도, 글도, 나를 담아낼 그릇이 되지 못했다.


어느 누구보다 내가 내 마음을 제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정말 몰랐다.

나를 잃은 채 엄마의 삶으로만 살다 보니,

어느새 백발이 되어 있었다.


나는 늘 무언가를 선택해야 할 때마다 머리가 하얘졌다.

수많은 선택의 갈림길 앞에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가족 일을 하다 보면 내가 해야 할 일의 우선순위도 자꾸 놓쳤다.

늘 다른 사람의 필요가 더 급하고 더 중요해 보였다.

그러다 보니 내 마음이 얼마나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었는지조차 모른 채 살았다.


그래서 결국 내 색깔이 사라진 것 같았다.

나의 감정도,

나의 바람도,

나의 기쁨도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 와서야 깨닫는다.

내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던 이유를.

늘 살아내기 위해 숨만 쉬었을 뿐,

몸과 마음은 마비된 채 버텼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래서 늘 공허했다.

알 수 없는 결핍이 늘 따라다녔다.

희락이 없는 삶.

오직 노애만 가득한 시간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억울하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투정 한 번 부릴 수 없었다.

받아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으니까.

그마저도 사치라고 믿으며 살았다.


지금도 날 인정해 주는 사람은 없다.

내가 온 힘을 다해 보살펴준 아이들도,

이제는 나를 너무 쉽게 대한다.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서운함을 말할 수도 없다.

나를 보이고, 나를 표현하려 했는데,

그럴수록 부딪히는 게 많아졌다.

그래서 이제는 혼자가 좋다.

부딪히지 않아도 되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을 뿐이다.

어느 누구도

나를 토닥여주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나를 사랑해야 할지.

늘 타인에게 그 사랑을 알아달라고 기대하고 바랐는데,

결국 내가 나를 사랑해 주는 것이 정답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이제는 조금씩이라도 감각을 느껴보고 싶다.

따뜻한 햇볕에 내 손을 잠시 놓아두는 것부터,


커피 한 모금이

내 혀에 닿는 그 순간을

천천히 음미하는 것부터 해보고 싶다.


좋아하는 향을 찾아서 깊게 들이마시고,

지나가는 바람이 얼굴에 스칠 때

그 시원함을 느껴보고 싶다.


아침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의 색을

번만이라도 바라보고,

지금 이 순간 내가 살아 있구나’

하고 느껴보고 싶다.


그렇게 아주 작은 감각부터 다시 배우고 싶다.


그것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첫걸음일 것 같다.

이제는 정말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