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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Nov 22. 2019

날이 갈수록 타인에 대한 연민이 사라진다

내 안의 냉소주의자

점심시간 5분 전이었다.


"고라니! 고라니 어디 있어!" 사무실 밖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나가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뿔이 단단히 나 있다. 민원결과 통서를 손에 쥔 걸 보면 항의하러 온 게 틀림없었다. 조용달래며 상담실로 안내드리는데 팀원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날 슬쩍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밥을 먹으러 나갔다.


겨우 민원인을 돌려보내고 나니 피 같은 점심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난 갑자기 찾아와 나를 고소하겠다고 협박한 민원인보다, 무심히 가버린 동료들에 대한 배신감에 속이 울렁거렸다. 같이 밥을 먹기로 약속한 것도 아니었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혼자 진상민원인과 남겨졌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게다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도 오늘처럼 진상민원인이 찾아왔었다. 난 씩씩대며 기억을 되새겼다. 그리고 떠올랐다. 그땐 웬 아주머니가 왔었는데, 아... 생각해보니까 내가 아니라 과장님을 만나러 왔었구나. 그때 난... 혼자 밥을 먹으러 나갔지.


순간 머리가 띵해졌다.




민원담당자에게 있어 타인에 대한 연민은 독이다. 괴로운 심정을 끝없이 하소연하는 상대에게 감정이입을 하면 고통이 전이된다. 하루에 한 사람만 상대한다면 풀패키지로 커스터마이징 상담이 가능하겠지만, 민원인의 숫자는 최소한 두 자릿수 이상이다. 감정도 소모품이어서 아껴 쓰지 않으면 닳아 없어진다. 적당히 경청하고 냉정하게 끊어내야 지치지 않는다.


방심해서 마음을 열었다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기 십상이다. 진상민원인도 처음에는 다른 보통의 민원인처럼 "억울"한 마음을 갖고 공공기관을 찾는다. 문제는 이들은 항상 우리가 가진 권한 이상의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점이다. 억울한 마음은 곧 담당자에 대한 "분노"로 바뀐다.


"내가 화가 나는 건 공공기관 주제에 뒷짐 지고 구경만 하는 니들의 그 태도야!"며 소리치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에도 울분이 쌓인다. 길을 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으니 그 돌멩이를 만든 사람을 찾아서 손해배상을 받아달라는 식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다, 결국 나도 화가 치밀어 롯데월드타워 꼭대기까지 분출될 지경이 되는 것이다. 받은 만큼 되돌려 줄 처지도 못 되니, 애초에 상처를 안 받게 마음을 닫는 것이 상책이다.


지나친 연민은 객관적인 판단을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언변에 능한 민원인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혼이 나간다. "아니 이렇게 부당한 일을 당하셨다니! 제가 도와드릴게요!" 신명 나서 일을 하다 민원인의 말이 순전히 개뻥이었다는 걸 알고 벙찐 경험 한두 번이 아니다. 누구나 본인에게 유리한 사실은 부풀리고, 불리한 부분은 숨긴다. 그러니 최대한 차가운 가슴을 유지하고 이야기를 듣는 게 최선이다.


한 번 차가워진 심장은 예열에 긴 시간이 필요하다. 하루 8시간의 근로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평생 하루에 한 시간만 투자해도 한 분야의 대가가 될 수 있다는데 하물며 직장은 어떨까.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은 내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일하며 만나는 사람들, 느끼는 감정들, 하는 말들이 곧 회사 안과 밖에서의 나를 결정한다.


감정을 거세하고 타인을 외면하는 데 익숙해지면 가까운 사람에게까지 그 여파가 미친다. "너의 고통은 너의 것"이라는 문장이 내 사고를 지배 그 누구의 아픔에도 공감하지  괴물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로 가득한 사무실 풍경은 삭막하다. 겉으로는 서로 간섭하지 않는 분위기처럼 보여도, 속을 들여다보면 아픔을 나눌 여유가 없 자기 안에 침잠 냉소주의자들이 있을 뿐이다.


내가 혐오해마지 않던 이들과 똑같이 변해가는 내 모습을 발견하는 건 괴롭다. 특히 온 마음을 쏟아야 마땅한 사람들에게까지 냉정해지는 건 정말 최악이다. 꼰대 부장 때문에 너무 힘들다는 애인에게 "나도 힘들어"라고 말하고, 기말고사를 망쳤다는 후배에게 "그래도 넌 어려서 좋겠다"하는 소시오패스 태어나 순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린 괴물이 되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다. 성인군자는 못 되더라도, 민원인을 만나러 간 동료가 돌아 때까지 점심을 안 먹고 기다려줄 수는 있다. 인신공격을 당해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료에게 마카롱 하나쯤은 건넬 수 있다. 내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많은 것이 변한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너무 깊어 결코 치유되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 덕분에 쉬이 낫기도 한다. 


진상민원인과의 전쟁이 끝나고 "어휴, 웬 또라이야?"라고 물어주 선배의 한 마디, 고생하셨다며 후배가 건네 준 초콜릿의 달콤함이 잊히지 않는 건 그 때문이다. 우린 화나고 상처 받고 한숨 쉬는 와중에도 가까스로 손을 내밀어 서로의 어깨를 토닥여줬는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작아 금방 잊었을 뿐이지.


그래서 결심해 본다. 일을 할 땐 내가 가진 감정의 딱 절반만 쓰기로. 나머지는 아끼고 아꼈다가 회사 밖에 있는  사람을 위해, 그리고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동료를 위해 쓰기로. 쉽게 탕진하기엔 내 감정은 너무 소중하고 귀하다. 그러니 아껴 쓰고 바로 써야 한다.


진상민원인에게도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내가 이 분야의 끝판왕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텐데 정년퇴직 전에 그런 날이 오려나 싶다. 지금은 그저 밉기만 하다. 절실한 목소리와 억울한 사정을 들으며 우러나는 충동적인 감정은 연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진짜 연민은  럴 수밖에 없는지  사람의 사정을 상상하고, 이해하고, 알려고 노력하는 과 있지 않을까.


참 더럽게 어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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