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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Nov 13. 2019

진심으로 안 할 거면 가만히 있었으면 좋겠다

간신배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

어느 조직이나 로열티 높은 직원들이 있다. 내 첫 직장은 재벌그룹의 한 계열사였는데 입사 초반에 문화 충격 받은 적이 많다. 한 번은 회사 근처에서 술을 마시 우연히 같은 팀 과장을 만났다. 반가운 척하며 인사를 는데 그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는 게 보였다.


다음 날 아침, 과장은 출근하자마자 나를 불렀다.


- 어제 보니까 참이슬 마시고 있던데... 라니씨 하이트진로 다녀?

- ?

- 우리 그룹사 소주 만드는 거 몰라? 그건 라니씨 입맛에 안 맞나?

-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 나였으니 망정이지 팀장님 보셨으면 술상 엎으셨을 거. 조심해라.


어떤 팀장은 사무실에 그룹 회장의 액자를 걸어놨고(김일성인  알았다), 또 어떤 팀장 금단의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사장 퇴근시간에 맞춰 엘리베이터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였다. 사장의 퇴근시간은 밤 10시였다. 연히 팀원들도 매일  시간까지 퇴근을 못 했다.


무릎을 탁 칠일은 따로 있었다. 저들의 전략 효과 있었 것이다. 이들은 갸륵한 충성심을 인정받아 승진 가도를 달렸고, 임원진의 특명을 받아 중대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니까 노조 파괴하기, 미투 고발한 여직원에 대한 안 좋은 소문 퍼뜨리고 제 발로 나가게 만들기, 사측에 불온한 사상을 가 직원 블랙리스트 만들기 등 거창한 업적을 채워 나갔다.




공공기관 역시 이런 사람으로 드글거리는 건 마찬가지다. 이들은 평소에는 감정노동으로 고통받는 직원들을 '멘탈이 약해서 못 써먹을 요즘 것들' 취급하다가, 민원부서 업무환경을 개선하라는 기관장의 지시에 헐레벌떡 현장으로 달려온다.


「산업안전보건법」이 개정되며 감정노동자의 권리가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자 가장 빨리 움직 자들도 이들이었다. 업적 쌓기 좋은 기회라고 판단을 것이 뻔하다. 그 덕에 우리 기관에도 민원담당자 보호를 위한 특단의 조치가 있었다. 전화 안내멘트, 힐링캠프, 휴게공간 등이 그것이다.


민원담당자에게 전화를 하면  "지금 전화받는 사람은 사랑하는 우리 엄마예요~" 같 구구절절한 멘트가 나온다. 이걸 만든 사람은 상대방의 감성을 저격하는 회심의 카피를 떴다고 생각할모르나, 사실 안 하느니만 못한 조치다. 당신이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선을 지키라 말하는 대신 선의와 온정을 구걸하게 되면, 진상민원인들은 오히려 기고만장해진다. 내가 은혜를 베풀어 친절하게 대해줬더니 왜 일처리를 이따위로 했느냐고 말할 구실만 제공하는 꼴이다.


사람이 사람한테 예의를 지키는 것에서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도록 유도하는 방식아무런 효과가 없다. 기본적인 예의와 상식이 없는 이들은 성희롱이나 폭언 시 법적 조치를 하겠다는 경고를 들어야만 비로소 언행을 조심한다. 최소한의 공감능력을 가진 사람 애초에 저런 무례한 행동을 하지 으리라는 걸 왜 모를까.


두 번째 특단의 조치, 힐링캠프로 말할 것 같으면 새벽에 버스를 타고 2시간 반 거리의 지방으로 내려갔다가 산책 좀 하고 복귀하는 초호화 럭셔리 투어다. 일정이 끝나면 온 몸이 녹초가 돼 있다. 다음 날은 더 피곤하다. 민원처리를 독촉하는 부재중 전화 50통씩 찍혀 있다. 일일이 전화를 돌리며 민원인을 달래다 보면("일은 내팽개치고! 내 세금으로 놀러 갔다 왔냐!") 하루가 그냥 지난다.


대망의 휴게공간은? 창고로 쓰던 비좁은 발코니에 테이블과 의자 서너 개 갖다 놓은 게 전부다.


 



물 들어왔다고 다급하게 노 젓는 시늉을 하니 이런 일이 벌어진다. 탁상공론의 결과는 끔찍하다. 담당부서의 장은 기관장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하명하신 대로 민원부서 고충 해결을 위한 조치를 취했고, 모두 만족하며 기관장의 은덕을 칭송했노라. 실무경험 없는 기관장은 흐뭇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간다.


해결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문제가 치유된 것처럼 포장하고 넘어가면 개선은 더 요원해진다. 조직의 간신배들은 그다음부터 실무자들의 목소리를 정당하게 잘라낸다. 해달라는 대로 다 해 줬으니 그만 징징대라. 


이들은 애초에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없었다. 핵심을 건드리는 대신 곁가지를 쳐내며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윗선에 보고하고, 그것을 자신들의 공으로 돌리는 데에만 집중했을 뿐이다.



감정노동자의 업무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강경하게 대응하면 된다. 찾아와 행패를 부리거나 성희롱을 일삼는 민원인이 있으면 경찰에 고소하면 된다. 전화로 쌍욕을 하면 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대응했다가는 담당자만 다친다. 조직은 직원을 보호하지 않는다.


국가기관이 공권력을 이용해 선량한 국민을 탄압했다는 소문이 나면 기관장 이하 임원들에게 치명적이다. 그들은 임기가 정해진 계약직이다. 리스크를 감수하고 정공법으로 대응하는 것보다 내부 직원을 어르고 달래는 게 싸게 먹힌다.


무엇보다 임원들은 공공기관 경영평가 점수에 엄청나게, 정말 엄청나게 민감하다. 나 같은 말단 직원은 A를 받으나 C를 받으나 별반 다를 것이 없지만, 임원들 그 결과에 따라 성과급 수천 만 원이 왔다 갔다 한다. 그리고 고객만족도 점수는 공공기관 경영평가에서 핵심적인 지표다.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임원들은 자신이 가진 강력한 무기 인사권을 휘둘러 사무라이들을 소집한다. 사무라이들 역시 알량한 권한(평가권, 휴가 반려권, 업무 배분권, 점심시간 박탈권, 야근 강요권 등)을 십분 활용한다. 자발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직원들은 당근으로 달래고, 그렇지 못한 직원들은 채찍으로 어른다. 조직 내 먹이사슬이 작동하는 모범례라 하겠다.


외부의 악성민원인과 내부에서 칼을 휘두르는 간신배들 사이에서 감정노동자는 그렇게 소외된다.




단순히 멍청해서, 실무 경험도 없고 관심도 없어서 헛발질하는 건 괜찮다. 그럴 수 있다. 정말 화가 나는 건, 오히려 상황악화시켜 놓고 대단한 혁신이라도 한 것 마냥 으쓱대는 간신배를 볼 때다. 타인의 고통을 이용해 자신의 안위를 챙기는 자들은 더 높은 차원의 악당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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