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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Sep 05. 2019

보람은 꽁꽁 숨기고 출근합니다

내부의 적 '내 안의 보람이'

우리 회사에는 욕받이 인센티브가 따로 있다. 이름하여 민원수당 5만 원 되시겠다. 한 달에 5만 원 더 받자고 민원부서에 지원하는 사람은 없다. 그거 모아서 팔자 고칠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 푸는 돈이 더 드니까.


그럼 얼마 주면 민원부서 갈래. 치열한 논쟁이 붙었다. 동기 점심때 흔히 있는 탁상공론이었는데 대세론은 이랬다.


얼마를 줘도 안 간다.


감정노동의 대가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다시 상처 받아 결국 사람 불신하게 되는 손해는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을 수 없다. 한 달에 백만 원쯤 더 주면 가겠다는 동기는 있었다. 그러나 임금인상률이 물가상승률도 겨우 따라가는 판에 현실성 없는 얘기였다.




난 민원부서에 제 발로 걸어 들어온 케이스다. 보람 찾겠다고 깝죽대다 사기업에서 공공기관으로 이직했기 때문에 민원부서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당장 현장에서 타인에게 도움 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선배들은 어차피 언젠가는 가게 될 거라며 민원부서는 피하라고 했다. 하지만 보람 찾느라 눈 뒤집혀 있던 내게 그런 소리가 들릴 리 없다. 정글 같은 사기업에서 구르다 왔으니 별거 아닐 거라는 근자감도 있었다.


주제 파악은 금방이었다. 이 바닥에서 담당자 한두 명쯤 사표 쓰게 만들었다는 진상들만 문제가 아니었다. 민원인들은 모두 문제의 해결을 읍소하며 우리 기관을 찾는다. 이미 누군가와 치고받고 싸우느라 뿔이 날 대로 나 있다. 그 화를 고스란히 받는 건 민원담당자의 몫이다. 저들의 울분 온몸으로 받아내다가 흐느적거리며 퇴근하는 동료들을 보면 슬라임이 따로 없었다.


민원해결을 위해서는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대방을 다독이고 위로하는 와중에 펙트까지 디테일하게 파악해야 하니 보통 대화 스킬 필요한 게 아니다. 다들 본인에게 불리한 사실은 숨기려고 한다. 객관적인 자료를 확보하려면 지난한 설득이 필요하다.


민원인이 너무 고령이거나 외국인이어서 의사소통이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럴 땐 땅에 헤딩밖에 답이 없다. 유관기관에 연락해 자료를 동냥하거나, 직접 현장에 나가 발품을 팔기도 한다. 그렇게 겨우 모은 자료를 토대로 민원인이 입은 피해의 해결을 돕는 게 나의 일이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쳐 사건을 해결했을 때의 희열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리 사소한 사건도 당사자에겐 가슴에 피멍 드는 상처일 수 있다. 연세가 여든 넘으신 어르신께서 고마웠다고 비타오백 한 병을 주고 가는데 눈물이 핑 돈다. 드래곤볼이나 인피니티 스톤 모으듯 하나 둘 축적한 보람은 진상 민원인을 만났을 때 버틸 수 있는 힘이 된다. 그러니까 민원수당 5만 원은 줘도 그만, 안 줘도 그만인 것이다.




그렇다. 난 우리 기관의 숨은 보람 맛집이다. 내가 원하던 걸 얻었기에, 작은 월급과 강도 높은 감정노동에도 이 직업을 가진 걸 후회한 적은 없다. 일은 단순히 먹고사는 것 이상의 무언가다. 난 내 일에서 가치와 의미를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보람 운운하며 직원들의 감정을 착취하는 라떼장인들을 혐오한다. 국가의 녹을 먹는 자로서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는 해묵은 망령이 죽지도 않고 떠돌아다니는 탓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민원인들의 언어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있다. 보람을 먹고사는 나 같은 사람이 많아지면, 직원들의 고통에 침묵하는 조직 면죄부를 받기 쉽다. 동기부여를 알아서 잘하는 노동자일수록 더욱 거리낌 없이 사용당한다. 더 많은 진상민원인과 더 많은 감정노동도 보람이라는 마법의 단어 앞에 대수롭지 않은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사실은 따로 있다. 보람에 대한 집착은 자기 착취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그놈의 고맙다는 소리 한 번 더 듣자고 내 감정을 기꺼이 소모하며 수십 번씩 전화를 돌리다 보면 앞이 노래질 때가 있다. 내 깜냥을 넘어선 감정노동 끝에 남는 건 자기 최면밖에 없다. "그래도 이 일이 보람은 있지."


나를 지키려면 보람조차 조절해야 한다. 지나치면 잡아먹히기 십상이다. 그러니 난 앞으로도 내가 우리 기관의 숨은 보람 맛집이라는 사실을 숨기려 한다. 회사에도, 나에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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