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고라니 Aug 29. 2019

헌법 위에 민원

민원계의 대부, A 이야기

대한민국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우리 사무실엔 헌법 위에 민원 있다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돌아다닌다. 이곳에선 헌법이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성이 종종 무시당한다. 그중 한 사례를 소개하고 싶다. 이 에피소드는 갈 데까지 가고자 하는 민원인에게 유용한 매뉴얼이 될지도 모르겠다. 담당자의 영혼을 탈곡기로 탈탈 돌리는 노하우가 담겨 있으니까.




A는 내가 담당자로 지정된 첫날부터 무섭게 전화를 해댔다. 그는 우리 기관의 VIP(Very Impolite Person)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과거 A를 담당했던 30년 차 부장님조이런 사람은 평생 처음이라며 치를 떨었다. 누가 담당자로 지정될까. 모두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역시나 적시나 그럼 그렇지. 불운의 주인공은 나였다.


한 번 통화를 시작하면 1시간은 기본이었다. 결과가 안 좋으면 좋은 꼴 못 볼 거라는 협박, 세금 받고 편하게 일해서 좋겠다는 비아냥, 자신만 이런 일을 겪는 게 부당하다는 하소연 반복됐다. 한 번은 뜬금없이 어느 국회의원실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민원 진행 경과를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사회적으로 공론화되지도 않았고, 아직 종결되지도 않은 으로 이런 요구를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다음 날 아침, 9시가 되자마자 A의 전화를 받았다.


- XXX의원실에서 연락받으셨죠? 나 이런 사람이야. 그러니까 정신차리고 라구요.


민원처리 어마무시한 시간이 필요했다. A쉬지 않고 새로운 이슈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업무 특성상 작은 것도 그냥 지나갈 수 없어서 머리가 빠질 지경이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려고 전화할 때마다 이유 없는 고성과 폭언이 돌아왔다.

- 도대체 일처리를 어떤 식으로 하길래 그딴 걸 나한테 묻고 있어요 지금? 그쪽이 알아서 조사를 하고 나한테 알려줘야 될 거 아니에요!!

미세먼지 가득한 늦겨울, A를 만났다. A가 제기한 민원의 현장조사를 위해서였다. 해가 지고 모든 조사가 끝난 뒤에도 집에 가지 못했다. 피 토하듯 불만을 토로하는 A 덕 두 시간을 길거리에 서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몸이 벌벌 떨렸다. 추워서가 아니었다. 내가 부모의 원수라도 되는 양 노려보는 A가 이젠 두려웠다.


회의나 출장으로 자리를 비 때마다 A우리 팀 대리, 과장, 차장, 팀장 자리로 전화해 소리를 질러댔다.


- 담당자라는 인간은 도대체 어딜 놀러 거예요?


전화벨 소리만 들려도 심장이 쿵쿵 뛸 지경이 됐을 무렵, 드디어 모든 절차가 마무리됐다.

 



그때만 해도 난 A에게서 해방된 줄 알았다. 퇴근하고 <왕좌의 게임> 마지막 시즌을 보며 깔깔 웃던 기억이 난다. 우리의 북부군이 백귀들에게 난도질당하는 장면에서조차 해방감을 느꼈다. 치킨이랑 맥주는 어찌나 달달하던지. 당시 난 중요한 진리를 간과하고 있었다. 바닥 밑에 지하실 있고, 피콜로대마왕 다음에 프리더 있고, 울트론 다음에 타노스있다는 것을.


A우리 기관에 무단 침입하는 데 성공했다. 기습적으로 기관장 집무실 앞을 점거한 그는 직원들이 몇 시간을 설득해도 돌아가지 않았다. 경찰이 출동해 퇴거를 권고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은 이미 겪어봤기 대수롭지 않다는 투였다. A는 주차장에 기관장 관용차가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우릴 저주하며 돌아갔다.

 
남은 건 초특급 민원 파티였다. A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감사실에 전화해 민원결과가 부당하다며 항의했다. 정보공개청구는 기본이었고 상위 부처, 국민권익위원회, 감사원, 국민신문고에 고발성 민원을 넣었다. 우리 기관이 업무처리 규정을 어겨 부당한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이었다.


행정부 다음은 다시 국회였다. 이번에는 다른 정당의 국회의원실로부터 공문을 받았다. 민원 관련 자료 일체와 A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부분에 대한 해명, 업무 담당자의 인적사항을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 국회의원실에 찾아가 보좌관에게 소명하며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다음 타자는 언론이었다. 어느 날 기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기자는 제보를 받았다며 A의 민원 내용에 대해 취조하듯 물었다. 나무아미타불을 외며 하나하나 차분히 답변했다. 기자는 제보받은 내용과 사실이 달라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기사 올라오지 않았다.




 노련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벅찬 상대였다. 머리가 깨질  같은 스트레스 옥상에서 소리를 지르며 생각했다. 난 이미 졌다고. 져도 한참을 졌다고.


부족한 경험은 시간으로, 약한 멘탈은 몸으로 때웠다. A가 넣은 각종 민원에 대응하다 보면 퇴근시간지난 지 오래였다. 결국 본업무는 야근과 주말출근으로, 어떠한 보상도 없는 공짜노동으로 처리해야 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의문이었다. 어떤 억하심정으로 수많은 가슴에 비수를 꼽고 다니는 걸까.  자신을 진정시키는 내 동료에게 "어디서 대리 나부랭이가 지랄이야?"라고 소리치는 걸까.


역대급 민원 파티와 검증을 치며 어떤 곳에서도 업무과정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이미 만신창이가 돼 있었다. 조금실수나 태만도 없었지만 "일처리를 어떻게 했길래 회사까지 찾아오게 만들어?"라는 뒷얘길 들어야 했다. 같은 회사 사람이라고 내 편 아니다. 사정을 잘 아는 몇몇 동료 큰 힘이 돼줬다. 하지만 민원부서가 아닌 들은 회사를 시끄럽게 했다는 이유담당자를 탓할 뿐이다.


그 어떤 폭언에도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 적은 없다. 부탁한 적은 있다. 공격적인 언사를 듣기 괴로우니 조심해 달라고. 물론 그런다고 달라질 사람이었으면 민원계의 대부 자리를 꿰차지 못했겠지.


A는 얻고자 하는 바가 뚜렷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담당자를 괴롭히는 것이 최선이라 판단했. 그리고 사람을 효과적으로 괴롭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난 A가 자신의 이야기에 진심으로 빠져 있었음을 안다. 자신을 진정 피해자로 여겼기에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나를 노려볼 수 있었다는 걸 안다.


A는 민원인으로서 모든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했다. 난 그가 제도를 악용했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정당한 이유가 없는 억지 주장을 계속 받아주, A와 같은 이들은 선을 넘은 폭력까지 정당한 권리라고 믿게 된다. 과정에서 덧나는 감정노동자들의 상처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A는 총을 쏘지 않았으니까.

칼을 들고 찾아오지도, 뺨따귀를 때리지도 않았으니까. 

 유리멘탈 개복치였을 뿐이니까. 



헌법 위에 민원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별 것도 아닌 걸 거창하게 말하네 싶었다. 그러나 A를 비롯해 민원계의 수많은 어벤져스를 겪어본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저 붙들고 버틸 말이 필요했던 거겠지. 당신도.

이전 03화 진상 민원인을 세 종류로 나눠봤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