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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Aug 22. 2019

진상 민원인을 세 종류로 나눠봤다

나쁜 놈, 더 나쁜 놈, 이상한 놈

내가 낸 세금으로 밥 벌어먹는 놈이 감히 말대꾸를 하네?

그 따위로 할 거면 당장 사표쓰고 나가. 아님 내가 너 잘라달라고 국민신문고에 올릴테니까.

팀장 바꿔. 팀장 바꾸라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자리에 일어났다.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나를 향했다. 민원 결과에 승복하지 못한 민원인과 장장 1시간 30분의 통화를 끝낸 뒤였다. 그의 목소리에 분노, 짜증, 불신, 증오가 담겨 있었다.  


"라니씨. 나가서 쉬다 와."     


옆자리 과장님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난 쿵쾅거리는 심장을 움켜쥐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앞에 보이는 이디아에 들어가 457칼로리짜리 민트 초콜릿칩 플랫치노를 원샷으로 비웠다. 당수치가 급격히 상승하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당장은 내 멘탈을 지키는 게 우선이었다.


언어폭력이 일상인 이곳에선 나 같은 말단 직원이 잠시 사무실을 비워도 개념 없다는 소릴 듣지 않는다. 우린 서로에게 눈치 줄 에너지가 없다. 복장이나 말투로 후배를 트집 잡던 꼰대들조차 민원부서에 배치된 뒤엔 조용해진다.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기에, 우리끼리라도 서로 다독여줘야 한다.


점점 웃음이 없어지고 흰머리가 늘어간다. 다음 날 또 악의에 찬 목소리를 들을 생각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날이 많아졌다. 누군가는 내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탓에 별 것도 아닌 걸로 힘들어한다 말했다.  누군가는 그것도 못 버틸 거면 회사를 관두라는 소릴 쉽게도 했다. 겪어본 사람이 아니면 이해하지 못하는 종류의 스트레스를 안고 사는 건 서러운 일이었다.


입사 초반에는 무례한 사람들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불꽃남자 정대만도 아닌데 저리 뜨거운 분노를 안고 살면 본인 괴로울 거라고,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민원인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친절하게 대했다. 진심으로 들어주면 최소한 위로는 될 거라 믿었으니까.


물론 내 깜냥도 모르고 깝죽대던 시절의 이야기다. 내가 성인군자가 아니라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세상에는 친절에 친절로 답하는 사람보다는 '친절함'을 '만만함'과 동일시하는 사람이 더 많았다. 억울했다. 난 저들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도를 넘는 무례함에 일방적으로 맞춰 줄 이유가 없었다.


저들을 이해하려 애쓰기 전에 나를 지키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뒤 운동이나 취미생활로 풀리는 스트레스가 있는 반면, 속수무책으로 영혼을 갉아먹는 스트레스도 있었다. 민원 스트레스는 명백히 후자에 속했다. 내가 망가지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는 건 무책임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선 저들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기로 했다.




진상 민원인 유형은 크게 셋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진상"이다. 본인의 요구가 억지라는 걸 알면서 하나라도 더 얻어내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유형이다. 가장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이들로, 그래 봤자 더 얻을 게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의외로 깔끔하게 물러서기도 한다.


두 번째는 "일진형 진상"인데, 상대방을 괴롭히면서 쾌감을 느끼는 악질적인 유형이다. 이들은 쌍욕을 하지도, 찾아와서 행패를 부리지도 않는다. 그런 방식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듯 영리하게 괴롭힌다.


퇴근시간 뒤에 전화해 놓고 다음 날 "어제저녁에 전화 안 받으시던데~ 요즘 편하신가 봐요?"라며 속을 긁고, 일부러 11시 59분 혹은 5시 58분에 전화를 걸어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를 안 멈춘다. 점심 먹으러 1분 빨리 나가는 바람에 전화를 못 받으면 "담당자 고라니가 점심시간 전에 자리를 비웠습니다."라며 감사실에 제보하고, 퇴근시간이 지났으니 내일 통화하자고 하면 "담당자 고라니가 민원처리를 거부하여 부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라고 국민신문고에 글을 올리는 식이다.


세 번째 유형은 "음모론자"다. 자신이 부당하게 박해당한다고 믿는 피해망상증 민원인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들은 본인이 듣고 싶은 것만 듣기 때문에 절대 이해시키거나 설득할 수 없다. 자신은 선량하고 정의로운데 세상이 못돼 쳐 먹어서 피해를 당했다고 믿는다. 물론 그 못돼 쳐 먹은 악의 상징은 눈 앞에 있는 민원담당자, 즉 나다.

 

민원담당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진상은 마지막 유형이다. 이들은 어떤 짓을 할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다. 전화폭탄, 이메일폭탄, 펙스폭탄에서 끝나면 다행이다. 사무실에 찾아와 부서져라 출입문을 두드리거나, 얘기하다 말고 갑자기 주저앉아 울음이라도 터뜨리면 공포감에 머리가 하얘진다. 나도 회사원일 뿐인데 도대체 "촛불집회 때 너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한"이라느니, "적폐 세력 주제에 월급 받기 부끄럽지 않느냐"는 얘길 듣다 보면 이렇게 답하고 싶어 진다.


저도 그때 광화문에 있었는데요,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이 없는 당신 같은 사람은 민주주의 운운할 자격 없습니다. 스스로나 돌아보세요.



끝판왕은 저 세 가지 유형을 모두 가진 사람이다. 다음 글에서 민원인 A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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