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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Oct 25. 2019

팀장님. 저희 귀찮으시죠?

이것은 팀장인가 팀킬인가

공공기관 팀장을 소환하는 아주 쉬운 방법이 있다. 임원이나 기관장실에 민원을 넣는 것이다. 일주일만 매일 전화를 해보라. 실무자가 아니라 팀장 급 이상의 관리자로부터 연락이 올 것이다. 죄송하다고. 진정하고 자기한테 이야기하시라고.


그런다고 민원결과가 달라지진 않겠지만, 최소한 분풀이는 될 수 있다. 임원실에서는 분명 관리자들에게 면박을 줄 것이고("얼마나 일처리를 개판으로 했길래 여기까지 잡소리가 들려?") 내리갈굼은 실무자까지 이어지니까.


게다가 당신 진상민원인으로 영광스러운 이름을 날리게 될 테니, 명예도 얻고 화풀이도 하고 일석이조 아닌가. 그리고 실무자인 나도 뜻밖의 소득을 얻을 수 있다. 이 기회에 우리 팀장의 그릇을 파악할 수 있다.




팀장이 진상민원인과 통화를 시작하면 담당자는 귀를 쫑긋 세운다. 오랜 연륜과 전문성으로 민원인의 마음을 사로잡면 다행이지만, 그런 일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민원인의 악에 바친 목소리 사무실을 가득 채울수록, 담당자의 심장박동도 빨라진다.


- 당신 같은 저질 팀장이랑 얘기해 보니까 사무실 꼴이 어떻게 돌아갈지 뻔하네.

- 그 따위 무능한 직원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청년실업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야. 알아요?

- 담당자한테 당장 나한테 사과하라고 전하세요. 안 그럼 내가 당신네 기관장 고소해 버릴 거야?


청년실업의 원인을 명쾌하게 진단하는 적 통찰력과 협박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지고, 마침내 팀장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그때부터 2차전이. 담당자는 긴장에 휩싸여 팀장의 눈치를 살 것이다.


이때 그릇이 작은 팀장 아래와 같은 모습을 보인다.


한숨을 푹 쉰다.

미간을 찡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조각을 흉내 낸다.

업무 보고하러 온 직원에게 공연히 화풀이한다.

퇴근 직전, 담당 직원에게 메신저를 남긴다.
'내일 민원인한테 전화해서 무조건 죄송하다고 사과하세요. 무조건.'





팀장은 보통 부하직원들의 마음을 얻어서가 아니라 인사권자들의 귀여움을 받아서 그 자리까지 간다. 특히 계량적인 성과측정이 상대적으로 어려운 공공기관에서는 능력보다는 서기와 의전, 즉 "인사권자를 얼마나 잘 보필하느냐"평가의 기준이 된다.

저 정도 민원인이라면 이미 담당자는 만신창이가 되었을 가능성이 100%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팀장들은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한다. 임원들 점심예약 잡아주고 경조사 챙기느라 24시간 두 손 두 발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본인승진에 도움되는 실적 외엔 관심도 두지 않는 팀장이 태반이다. 최악의 사실은 이 정도 팀장은 그나마 중간은 간다는 점이다. 


그 따위로 해서 내 앞길 막을 거면 당장 때려치우라거나, 우리 때 같았으면 너 바로 조인트 까였어, 알아? 라며 윽박지르는 팀장은 아직까지 우리의 일상에 출몰한다. 눈엣가시같은 직원을 상대로 직장내 따돌림을 주도하는 비열한 이들도 여전히 존재한다.


팀장도 사람인데 폭언 앞에 의연할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직급에 상관없이 감정노동은 사람을 병들게 하니까. 또라이도 종이 여럿이라 아무리 내공이 강한 사람도 상극인 민원인을 만나면 타격을 받게 돼 있다. 그래도 무릇 팀장이라면 자신이 받은 내상을 아랫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만큼은 피해야 하지 않을까. 실무자들이 업무에 충실할 수 있게 서포트하고, 공공서비스의 질을 유지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니까.


물론 이건 이상론일 뿐이다. 현실에서는 도움을 요청할 때 귀찮은 표정이나 안 지으면 진정한 인격자요 멘토라 부를 만하다.




그렇다고 마냥 팀장 욕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우린 모두 알고 있다. 회사에 진짜 나쁜 사람은 별로 없다는 걸. 생존 앞에 치사해지는 약한 개인이 있을 뿐이라는 걸. 팀장 역시 월급 조금 더 받는 노동자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린 팀장에게 무언가를 기대하기보다는 팀장을 이용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팁이라기엔 거창하지만, 지금까지 효과를 본 몇 가지 방법이 있다.



1. 그래도 보고한다.

팀장이 못마땅하게 쳐다보면 눈을 피하며 보고한다. 한숨을 쉬면 헛기침을 하며 못 들은 척하고 보고한다. 무조건 보고한다. 꿋꿋하게.


"이 사람 조금 있으면 기관장실로 쳐들어갈 기세입니다."라는 식의 멘트도 첨가한다. 내가 힘든 건 참겠는데 조직에 위해를 입힐까 봐 걱정이라는 식의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그 순간, 나약한 요즘 것들의 징징거림은 사라지고, 중차대한 정보를 공유했다는 기특함만 남게 된다.


보고는 생명이다. 감당 안 되는 민원인이 있다면 팀장에게 미리 공유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도움을 요청할 때 마음의 부담이 덜하다. 책임을 나누는 효과도 있다. 조직 입장에서도 민원인의 난입에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으니 이득이다.


2. 힘든 티를 낸다. 정말 힘들 때만.

혼자 끌어안고 있다고 팀장은 기특해하지 않는다. "저 친구는 멘탈이 강하구만!" 흐뭇해하며 더 고난도의 진상민원인을 배정해 줄 뿐이다.


힘들 땐 힘들다고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팀장도 업무 배분할 때 그 점을 안배한다. 난 힘든 티를 잘 못 내는 성격이라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하곤 했다. 얼굴이 흙빛이 돼서 반차를 올린다든가, 도서구입 신청을 받을 때 정문정 작가의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을 신청하는 식이었다. 옥상에서 소리를 지르다 같은 팀원에게 들킨 적도 많다.


직접적으로 힘들다고 하소연한 적은 없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강철멘탈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그 덕에 진상민원인을 전담하는 상황도 모면할 수 있었다. 물론 평소에도 불평 가득한 투덜이였다면 이 방법은 효과를 보지 못했을 거다. 뭐든 적당히가 중요하다.


3. 고마울 땐 고마워한다. 

팀장은 마음대로 투덜대지도 못한다. 자리가 주는 무게감 때문이다. 그래서 민원인한테 온갖 인격모독을 당해도 혼자 삼키는 경우가 많다. 팀장도 부처가 아니니 결국은 다른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풀 수밖에 없다. 그게 아랫사람을 갈구는 방식이라면 내리갈굼이 시작되는 것이다.


사람을 고쳐 쓸 수 없다면 다루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팀장한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은 내리갈굼의 고리를 끊는 처방이 될 수 있다. 설령 마지못해 민원인을 상대해줬다 하더라도, 나 대신 방패막이가 되어 준 건 사실이니까.


그러니 까짓 거 고마워하자. 팀장이 나한테 화풀이를 하기 전에 먼저 선수 쳐 버리는 거다. 초콜릿이라도 드리며 고생하셨다고 말씀드리거나, 그게 지나친 것 같다면 메신저 쪽지라도 보내자. 그럼 팀장도 기분 좋게 퇴근할 것이고, 다음부터는 조금 덜 귀찮은 표정으로 대신 민원대에 앉아 줄지도 모른다.

 



진상민원인이 임원실에 전화를 하든 똥을 투척하든 부하직원을 탓하지 않고 "이 민원은 내가 집도한다."며 민원대에 앉는 사람, 외부의 적과 윗선의 압력으로부터 실무자를 지켜주는 사람이 팀장이라면 지치지 않고 수화기를 들 수 있다. 그것이 감정노동자들의 팀장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민원인의 항의가 정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하기 전에, 그런 건 모르겠고 피곤하니까 그냥 니가 사과하라고 강요하는 팀장은 팀장의 자질이 없다. 자신의 역할에 태만했던 팀장은 팀킬에 대한 사과의 의미로 커피라도 돌리시라. 맛있게 마셔드릴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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