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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라니 Apr 30. 2024

나의 친애하는 부캐들에게

내겐 여러 개의 이름이 있다. 평일 9-6 에는 본명으로 산다. 회사에서 크게 모난 데 없이, 적당하게 열심히 일한다. 퇴근 뒤에는 아내와 함께 가사노동자가 된다. 빨래를 넣은 뒤 청소기를 돌린다. 청경채 된장국을 끓이고, 본가에서 얻어 온 돼지 주물럭을 볶는다.

저녁식사 후에는 논객닷컴과 브런치에 칼럼을 쓰는 고라니가 되었다가, 부동산 투자 포스팅을 올리는 공인중개사 블로거가 되었다가 한다. 재작년에는 방통대 법대생이기도 했고, 작년엔 도배를 배우는 도배실습생이었다.






처음엔 단지 견디기 위한 목적이었다. 애정을 갖고 일할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더 힘들어지는 곳이 회사였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그러다 공들여 시간을 쏟는 일들이 하나둘 생겼다. 그러고 있는 내가 좋아졌다.

글을 쓰고 공부하는 일이 마냥 쉽진 않았다. 엉덩이도 무거워야 하고, 어떤 면에서는 회사일보다 더 큰 집중력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냥 쉴 때보다 오히려 더 힐링이 되니 신기한 노릇이었다. 새로운 걸 익히며 성장하는 느낌 덕분인가 싶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내가 넘어져도 또 다른 내가 서 있다는 생각은 마음에 여유를 가져다줬다. 어젯밤 올린 에세이의 반응이 좋으면 회사에서 보고서가 반려당해도 별다른 데미지를 입지 않았다. 뒤에서 나를 헐뜯고 다니던 동기가 먼저 승진을 해도 낙담은 오래가지 않았다.

동기가 임원들과 술을 마실 시간에 난 재테크 공부와 운동을 했다. 회사에 더 많은 에너지와 열정을 쏟은 이에게 그만한 보상이 따르는 건 합당한 일이다. 난 언젠가 '회사원'이라는 '부캐'가 사망했을 때 지금의 월급 차이보다 더 값진 게 남아있길 바란다. 그래서 퇴근 후의 시간은 철저히 회사 밖에서 사용했다. 결국엔 각자 뿌린 대로 거둘 뿐이다.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부캐들 덕에 요즘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수월하다. 하나의 역할에 집착하지 않으니 오히려 모든 일이 잘 풀리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이런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금 느끼는 균형감각을 잊지 않으려 한다.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아서 어떤 식으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른다. 사람과의 관계는 너무 어려워 언제 어떻게 어긋날지 알 수 없다. 일이든 사람이든 어느 하나에 올인하기엔 리스크가 크고, 무너졌을 때 아프다.



나를 지키는 가장 현명한 길은 부분이 아닌 전체를 가꾸는 것 아닐까. 그러니 나의 친애하는 부캐들에게 전하고 싶다.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논객닷컴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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