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부푼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by 고라니

작년 이맘때였나. 회사 선배랑 점심을 먹다가 선배의 아내분이 임신했다는 이야길 들었다. 워낙 오래 노력했다는 걸 알아서 진심으로 축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선배도 육아휴직 생각이 있는지 물었는데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기자회견에서 마약 루머가 사실이냐는 질문을 받은 스포츠 스타처럼 당황해하는 것이다. 난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몇 주 전, 난임병원에서 우리 아이의 심장 소리를 처음 들었다. 3센티도 되지 않는 녀석의 심장이 어찌나 우렁차게 뛰는지 아내 몰래 눈물을 훔쳤다. 감격 이후 떠오른 건 선배와의 대화였다. 내 일이 된다고 생각하니 이해되는 것이다. 그때 선배가 느꼈던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



우리 회사는 그나마 남자도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분위기다. 1년 이상은 드물지만, 3~4개월 정도는 한두 명씩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자연스러워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육아휴직을 신청하면 주요 부서에서 배제되고 “어차피 승진 밀리는 애잖아.”라며 인사고과를 최하위로 주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엔 30대 중후반에 아이를 낳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결혼도 출산도 늦어져서인데, 공교롭게도 업무 능력과 경험이 쌓여 핵심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시기와 맞물린다. 이때 휴직에 들어가면 커리어 측면에서 굉장한 데미지를 받는다. 물론 승진도 늦어진다.

내가 육아휴직을 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불이익은 당연히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해왔다. 동기들이 회사에 온통 시간을 쏟을 때 휴직을 선택했으니 말이다. 기여도가 적어지는 만큼 보상이 줄어드는 게 합리적이다. 책상을 빼는 것도 아니고 승진이 1~2년 늦어지는 건 육아휴직으로 얻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하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간과했던 건 소외감이다. 남자가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순간 별종으로 취급된다는 걸 몰랐다. 충심으로 모시던 부장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너 회사생활 이렇게 포기할 거야?”라고 말하고, 야망 있는 동기는 장난스러운 말투로 “경쟁자 하나 제꼈네”라고 말한다. 바쁠 때 혼자 “쉬러” 가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기도 쉽다.



승진이 누락되면 맘 편하게 인사권자들을 욕하면 된다. 하지만 소외감은 처치가 곤란하다. 회사는 결국 사람이 모인 집단이고, 사람에게서 받는 스트레스가 가장 크다. 회사에 뜻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상태에서 기존처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다. 복직 후 남들보다 2~3배는 열심히 일해야 간신히 이전 상태를 회복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이와 같은 과정을 먼저 겪은 사람들이 있다. 소위 워킹맘들이다. 지금 우리 회사에서 여성들이 보편적으로 1~2년씩 육아휴직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앞서 고통을 감수한 사람들 덕이다. 이제 남자들, 그러니까 워킹대드의 차례가 됐을 뿐이다.

어느 날 갑자기 세간의 인식이 변해 육아는 엄마와 아빠가 같이 하는 거고, 남자의 육아휴직은 당연한 권리라고 응원받을 리 없다. 정부에서 아무리 예산을 투입한다 하더라도 육아휴직에 대한 편견은 사라지진 않는다. 육아휴직을 신청하는 남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많아져야 아주 조금씩 달라진다.




부푼 마음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회사와 가정 모두에 좋은 사람이 될 순 없다.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냉철하게 계산하고, 육아휴직이든,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이든 도움되는 제도를 이용하면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들리는 상처 되는 말은 주워 담지 말자. 우린 아빠 엄마니까.



논객닷컴 게재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