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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어리 Aug 17. 2024

06 미련이 전혀 남지 않는 대화

유방암으로 인생역전 (6)

   수술 후에 확실히 집중력이 흐릿해졌다. 하지만 공부를 해야겠다 싶다. 퇴원 후 1주일 후에 내 주치의인 워낙 교수와 진료가 잡혀 있다. 조금 긴장도 된다. 수술 때 떼어낸 조직의 검사결과를 듣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에 따라 내가 몇 기 암인지도 정해지고 치료 방향도 정해진다. 워낙 교수는 진료실에서 빠르고 단호하게 설명한다. 그 속도와 스타일에 휩쓸려 '네', '네', '네'... 하다가 진료실을 나오고 나면 항상 물어보지 못한 말이 생각난다. 남은 질문 하나 없이, 조금의 미련도 없이 진료실을 나오고 싶다. 의사의 말을 선명하게 이해하고 싶다.


   공부하기로 마음먹으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내가 전절제를 했기 때문에 방사선 치료에 관한 공부를 생략해도 되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싶다. 유방암 환우들이 모인 네이버 카페(이하 '유이카페'라 칭함.)에 들어가 조직 검사 결과를 들을 때 교수와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를 검색해 보았다. 느린 속도로 며칠 동안 공부하고 다음과 같은 요약본을 완성했다.


   어떤 종류의 유방암으로 나올지 알면 공부가 확실히 줄텐데 그걸 알 길이 없다. 1번으로 나오면 항호르몬 치료법과 다중 유전자 검사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2번으로 나오면 표적 항암제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4번으로 나오면 세포 독성 항암제에 대해서 공부해야 한다. 공부할 양이 너무 많다. 나는 잔꾀를 부리기로 했다. 찍기 실력을 발휘하기로. 나는 꽤 괜찮은 찍기 실력을 가지고 있다. 시험 볼 때마다 찍어서 틀리는 경우보다 찍어서 맞는 경우가 더 많았다. 아무렇게나 찍으면 찍기의 달인이 될 수 없다. 찍기에도 근거가 있어야 한다. 학창 시절에는 출제하는 선생님의 평소 말투나 성향을 생각해 보면 찍기가 훨씬 쉬웠다. 그러나 이번 찍기는 참고자료가 별로 없다. 아니, 딱 하나 있다. 1번 비율이 다른 종류의 유방암보다 훨씬 높다는 것이다. 한국유방암학회에 들어가서 확인해 보니 2019년 기준으로 67.4%~76.7%가 호르몬 양성 유방암이었다. 어림잡아 4명 중에 3명은 호르몬 양성 유방암이라는 것이다. 과감하게 확률 높은 1번에 배팅했고 1번 위주로 공부했다.



   진료일이 되었다. 워낙 교수와의 진료는 오후 2시 40분이었다. 병원에 일찍 갔다. 1시경에 병원 진료기록 부서에 가서 서류를 신청하니 발급해 준다. 교수를 만나기 전에 내 조직 검사지를 미리 볼 수 있다니 다행이다. 조직검사 결과지에 가득한 영어와 숫자가 무섭지만은 않다. 예습의 위력이다. 잘 모르는 것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본다. 아싸! 호르몬 양성 유방암이다. 우하하~ 아직도 건재한 나의 찍기 실력을 보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머지 자료도 꼼꼼하게 본다. 모두 이해한 것은 아니었지만 다음과 같은 정도를 알아냈다.

호르몬 양성 유방암(아주 강한 양성) / 암의 크기는 15mm/전이 없음 / 암이 얼마나 공격적인지 보여주는 조직분화도 등급 :  3 (가장 나쁜 수치)/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를 보여주는 KI-67 지수 : 10%(중간 정도의 수치)

   다른 것보다 조직분화도 등급이 안 좋다고 하는 3으로 나오니 마음이 철렁하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나와 똑같은 사례는 못 찾겠다. 그러니 항암 여부를 미리 예측할 수가 없다. 예습을 이 정도로 했으면 워낙 교수의 말을 못 알아듣지는 않겠지. 이 정도로 하자. 진료 시간이 되어 진료실에 앉으니 워낙 교수가 모니터에 내 조직검사결과지를 띄어놓고 있다. 미리 봤던 거라 반갑다.

  "좋은 내용과 안 좋은 내용이 1개씩 있어요. 좋은 소식은 림프를 통해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는 않았다는 거구요. 나쁜 소식은 암 이 녀석이 좀 공격적이라는 거예요. 이 수치 보이시죠? 이게 1이어야 좋은 건데, 지금 이어리 님은 3이에요. 가장 나쁜 등급인 거죠. 이런 경우 10년 전만 해도 무조건 다 항암을 했어요."

   예습을 하고 들어서인지 이해가 착착 된다. 다 아는 내용이라 다 들리는 것일까?

  "교수님은 저도 해야 한다고 판단하시나요?"

  "요즘은 유전자 검사를 해서 항암 여부를 결정하기도 해요. 항암 하는 것이 베네핏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는 검사입니다. 돈이 좀 많이 들어요. 보험도 안 되구요. 검사결과에 따라 항암을 안 할 수도 있어서 하려는 사람도 많고요. 괜히 돈만 들고 항암이 3~4주 뒤로 늦춰지는 것이 불안해서 안 하시는 환자분들도 많습니다. 항암제도 암세포를 공격할 수 있는 하나의 무기니까요."

   "온코 검사로 하겠습니다."

  전문용어(?)를 쓰니 예습을 해왔다는 티가 나는 것 같아서 뿌듯하다.

  항상 자료에 눈을 둔 채 설명할 뿐 한 번도 내 눈을 보고 말한 적이 없는 교수가 내 눈을 잠깐 쳐다본다. 그때의 카타르시스란!  너는 대학병원 의사냐? 나는 예습하는 환자다!

    "공부 좀 하셨네요. 저는 맘마프린트를 권합니다. 폐경 전의 경우에는 이 검사를 많이 합니다."

    교수는 맘마프린트 검사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설명했다. 그 검사로 하겠다고 하고 진료실을 나와 3,630,000원을 결제했다. 돈을 이렇게 많이 쓰고도 기분이 좋았던 것은 처음 느껴본 '미련없음' 상태 때문이었다.


  3분 컷이 기본인 대학병원 진료실에서 미련 남지 않는 대화를 하기 위해 내가 그동안 주로 사용한 방법은 손등에 질문을 적어가는 것이었다. 그 방법도 손등에 적지 못했던 질문이 나중에 떠올라 미련이 덕지덕지 남았다. 해 보니 예습만이 최고의 방법이다. 대학병원 진료실에서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은 이들이여~ 예습을 강추한다! 나처럼 찍기를 해서 대충 하시든가, 아니면 모조리 하시든가 아무튼 예습을 권한다.





from 49세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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