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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만난 날

#88부부 #어플로 만나서 4개월 만에 결혼한 썰

by 유예지

2021년 2월, 3년간 멕시코에서 지내다 돌아온 나는 모든 게 불안했고 또 한편으론 다양한 꿈을 꾸고 있었다. 노이즈 캔슬링 기술이 들어간 강아지집을 개발해 볼까 하기도 했었고 다양한 컨텐츠가 있는 독립책방 겸 공간을 꾸려보고 싶기도 했다. 허무맹랑했지만 또 진지하기도 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던 중 코로나로 결혼식도 가지 못한 보고 싶던 친구부부의 집에 놀러 간 날이었다. 학부시절부터 같이 어울려 놀던 나 포함 여섯 명의 친구들이 있는데 그중 둘이 오랜 연애 끝에 결혼을 했다. 마지막으로 친구들을 본 게 각자 멕시코에 놀러 왔을 때였는데 내색은 안 했지만 집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묘하게 느낌이 달랐던 기억이 난다. 여전히 각각 소중한 친구들이지만 둘이 묶여 하나의 겹이 더 싸여 견고해진 느낌. 아늑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공간과 뚱보 고양이 두 마리. 어느 서정적 에세이집에 배경 같은 따뜻한 분위기.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며 내 눈에 담기는 친구와 친구가 담긴 배경이 참 좋아 보였다. 그때 처음으로 어렴풋이 이런 가정을 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차. 처음으로 돌아와서. 남편인 친구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아내인 친구는 쉬고 있었는데 나는 쉬고 있는 친구를 꼬셔서 책방 겸 작은 공간을 꾸려보자 할 속셈이었다. 그래서 혹시 앞으로의 계획이 있냐 슬쩍 묻는 나를 멀뚱히 서서 바라보던 친구의 표정이 생생하다. 대답할 시간이 지났는데..?


'....나 아기 가졌어..'


계획이고 나발이고 정말 이상한 감정으로 주책맞게 일단 눈물이 차올랐다. 테스트기를 확인한 지 얼마 안 되었다고, 아직 둘만 알고 병원에 가보기 전이라고 했다. 정말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 나는 그냥 친구인데도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조심스러웠던 기억이다. 동시에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만약 이렇게 예쁜 가정을 꾸리고 아기를 낳으려면 서둘러야겠다! 올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 보고 안되면 혼자서 엉뚱한 일을 벌이며 살자! 그때부터 제법 열심히 소개팅을 하기 시작했다. 내 나름의 노력도 했는데 유튜브로 화장법도 공부하고 누구 좋은 사람 없냐 묻기도 했다. 주로 강남이나 잠실에서 예쁜 음식을 먹으며 시간 아까운 대화를 하다 젖은 물걸레마냥 처져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아 공허한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내가 이러려고 태어난 건 아닐 텐데..' 하며 끝이 났다.


그러다 친한 언니와 밥을 먹으며 신세한탄을 하니 어플을 하나 추천해 줬다. 나는 가정을 꾸리고 싶은데 어플이라니? 하는 마음이 컸지만 일단 (못 이기는 척) 언니의 디렉션에 따랐다. 셀카를 정말 안 찍어서 드문드문 만날 때마다 언니가 찍어준 3년 된 사진, 2년 된 사진을 올리고 취향과 외모를 선택하는 것도 언니의 지시에 따랐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도저히 못 쓰겠는 자기소개글은 '언니 이리 줘 봐!' 하며 동생이 기깔나게 써주었다. 그즈음 일하는 가게에서 손님들 선물용 쿠키를 몇 번 구웠는데 취미로 베이킹을 고르고는 둘이 같이 깔깔 웃던 기억이 난다. 며칠간 또 방치하다 한가한 시간에 쌓여있는 알람을 읽다가 오 좀 귀엽네 싶은 사람과 첫 매칭. 그때 까지도 실제로 만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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