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산도 May 23. 2024

"짐을 그쪽 자리에 뒀는데 괜찮으시죠?"

뭐래? 하고 다투지 않기

"짐을 그쪽 자리 앞에 뒀는데 괜찮으시죠?"


낯선 터미널에서 서울로 향하는 고속버스를 탔다.


급하게 애매한 터라 자리가 얼마 없었다.


평소 같으면 운전석 근처에 타고 내리기 편한 리를 택했겠지만 그때의 나에게 마땅한 선택지는 없었다.


그래서 남은 자리 중 맨 뒷자리 창가를 선택했다.


터미널을 상징하는 수많은 이별과 만남을 구경하다가 시간 맞춰 버스에 올랐다.


터미널에서 잠시 들린 카페.


계단에 올라 좌석 QR코드를 찍으면 낭랑한 목소리가 자리를 안내한다.


처음에는 놀이공원에 입장하듯 QR코드를 찍고 타는 버스가 세상 낯설고 신기했는데, 그 사이에 적응됐는지  목소리가 들려야 마음이 놓인다.


"그래. 너는 맞는 버스를 탔고 옳은 길을 가고 있어"라고 해주는 듯해서 더 그렇다.


그날도 이 음성안내를 들으면서 내 자리를 향해 걸어갔다.


어서 이 한 몸을 눕듯이 의자에 맡기고 유튜브나 좀 보다가 잠들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그렇게 도착한 자리를 내 기대를 제대로 무너지게 하기에 충분했다.


다리를 편하게 두기 힘들 정도로 내 자리와 앞자리 사이 틈에 짐이 한가득 쌓여있었다.


난감해하는 찰나 짐의 주인으로 보이는 옆자리 중년 여성이 말을 걸었다.


"거기에 짐을 좀 쌓아뒀는데 괜찮죠"


너는 괜찮아야 한다는 듯, 답을 정해둔 질문에 나는 순간 질려버렸다.


예전 같았으면 "뭐래?"라고 하며 대놓고 다퉜을 일이다.


하지만 목적지까지 옆에 앉아 몇 시간 동안 함께 해야 하는 상황과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차분해지기로 한 마음가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능글맞음을 정착했다.


"아유, 괜찮냐고 물어보셨는데 안 괜찮아서 어쩌죠?"라고 답하며 난처하게 웃었다.


이 기류에 오히려 뒷자리에 다른 어른들이 나섰다.


다른 사람 불편하게 하지 말고 자리 위 캐비닛에 짐을 올리라는 지적에 허둥지둥하며 그제야 짐을 치웠다.


그렇게 나는 내 뒷자리도 없고 앞자리와의 공간도 여유가 있어서 눕듯이 갈 수 있는 28번 자리의 편안함을 누렸다.


#터미널 #편안함 #휴식 #짐 #다툼

작가의 이전글 지쳤을 때만 잠을 청해볼까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