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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사의 변압기 Sep 07. 2024

애물단지가 아닌 이해와 사랑받을 존재

둘째 아들이 태어났다. 눈이 작은 큰 아들에 비해 눈도 크고 똘망똘망 예쁘게 생겼다. 큰 아들은 누굴 닮았는지 입술은 뚝 까져있고 누군가 괜히 건들고 싶을 만큼 부담 없이 생겼다. 그러나 둘째는 귀공자 타입이다. 그래서인지 더 마음이 가고 많이 안아주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예쁘게 잘 자라던 둘째가 여섯 살 때부턴가 감기를 달고 살았으며 말을 심하게 더듬기 시작했다. 한의원에 가보니 애가 기가 약해서 그런다며 한약을 먹여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한약을 먹여도 보았지만 차도가 없었다.


성민이가 말은 더듬었지만  잘하는 게 많았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하모니카를  직접 배우며 잘 부르다고 칭찬을 받기도 했다. 달음박질을 잘하여 육상선수로 키워 볼까 할 정도였다. 지역아동센터에서 난타를 배워 공연도 여러 번 나갔다. 탁구도 잘했다. 또래아이들과 상대가 안되어  어른들과 맞짱을 뜰 정도였다.

성민이가 예체능 쪽으로는 재능이 있어 보이는데  공부는 잘  따라가지 못했다.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표현하지 못하고 끙끙 속으로 앓다가 해코지를 할 때가 종종 있다. 성민이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말 더듬는 것이 심하여 언어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지적 장애가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의사 선생님은 장애인 등록을 해서 각종 혜택을 받으며 성민이의 앞 길을 도와주도록 권했지만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장애는  남의 집 일이지 나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했기에  우리 집에 장애인이  있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성민이가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좋아지기는커녕 더 문제가 터 지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고 같은 반 아이가 찔끔찔끔 건들고 장난치는 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힘들어했다. 급기야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못하고 학교 주변을 배회하기도 하였다. 어떤 때는  학교에 갔다가 갑자기 집으로 와버려서  성민이가 사라져 버렸다고 담임선생님으로부터 전화 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또  언젠가는 학교에서 바지에 응가를 하여  선생님께서 곤욕을 치른 적도 있었다. 아내와 나는 오늘은 아무 일 없이 잘 다녀와야 할 텐데 노심초사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하지만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 주변을 배회하다가 집으로 와 버리는 횟수가 늘어나자  안 되겠다 싶어 내가 다니는 시골중학교로 전학시켜 관사에서 내가 데리고 있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결국 이듬해  1학년을 마치고 2학년부터는 내가 근무하는 중학교에서 다니게 되었다. 전교생이 40여 명 되는 작은 시골학교로 아이들도  때 묻지 않고 순박해 보였기에 성민이가 여기서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적응도 잘하리라고 생각했다. 몇 달은 잘 지내는 듯했지만 예전처럼 다시 수업시간에 들어가지 않고 교사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담임선생님은 성민이가 학교에 적응을 못하고 있다며 정신과 쪽으로 치료를 받아보면 어떻게냐고 조심스럽게  면담을 해 왔다. 나는 대수롭지 않은 듯 그러냐고 생각해 봐야겠다고 말은 했지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일부러 전학까지 시켜서 시골까지 왔는데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 속이 너무 상했다. 못난 아들을 두어서 창피하기도 하고 아들 때문에 개고생 하는 것 같았다. 이제는 아들이 기쁨이 아니라 짐이 되어 버렸다.


나는 성민이가 사람과의 관계의 장벽이 약간 있고 성장이 조금 더딜 뿐이지 보통사람과 다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몇 년 전에 모 병원에서 받은 지적 장애 판정이  믿기지 않았고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성민이를 자퇴시키고 교회에서 운영하는 사설 대안학교에 보내게 되었다. 한 달 학 비가 백만 원이 훨씬 넘을 만큼 비쌌다. 하지만 비싼 교육비를 지불해서라도 아들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성민이가  대안학교에서도 처음에는 힘들어했지만 고비를 잘 넘기고  3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중고등과정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그리고 대입검정고시도 합격하여 부모에게 오랜만에 기쁨을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성민이에게 군대문제가 걸렸다. 검정고시는 합격했지만 지적장애가 있는터라 군대 가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사고를 치면 어쩌나 별별 생각이 들었다. 공익요원으로 빼든 지 해서 어떻게 해서든 군대를 보내서는 안 되겠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미루어 왔던 장애인 등록을 하였고 지적장애  증명서를 들고 성민이와 함께 병무청에 가서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날 바로 결과가 나왔다. 제발 공익요원도 좋으니 군대만 가지 않게 해 달라고 빌었는데 생각지 않게 군대면제 판정을 받게 되었다.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짐이 벗겨져 날아갈 듯 기뻤다.


성민이가 검정고시를 합격했기에 대학에 원서를 낼 수 있었다.   장애를 가진 성민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대학을 찾다가 충청도에 있는 나사렛 대학을 알게 되었고 면접에서 최종 합격하여 다니게 되었다. 그러나 성민이에게 쉬운 과정이 아니었다. 리포트 과제가 많고 수업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코로나가 급속히 확산되던 때라 비대면수업이 잦았다. 결국에는 한 학기만 마치고 휴학을 하고 집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성민이가  집에만 있으니 심심했나 보다. 놀아줄 친구가 필요했는지 나에게 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보채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는 들은 시늉도 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핸드폰이  유일한 낙이 되었다. 집안퉁수가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만 틀어박혀 게임하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게임중독에 빠진 것이다. 그것도 사행성 게임에 빠지게 되었다. 돈만 있으면  게임비로 날려버렸다. 명절 때마다 친척들로 받은 용돈을 하루가 가기 전에 게임비로 써버리기도 했다. 또한  장애인 일자리에서 받은 한 달 급료 -90만 원도 안 되는 급료- 가 통장에 들어오기가 무섭게 게임비로 빠져나갈 때면 머리에 뚜껑이 열릴 정도였다.


 아들은 지적 장애로 복지관에서 추천해 준 회사에 다니게 되었다. ㅇㅇ 바이오산업이라는 유산균 식품가공업체에서 제품을 박스에 담고 포장하는 단순 작업을 하였다. 급여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하루 4시간 정도 일하고 오기 때문에  몸이 허약한 아들에게는 딱 맞는 일자리라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성민이가 중학교와 대안학교에 다닐 때처럼 힘들면  가지 않거나 그만  다니고 싶다는 둥 안 좋은 버릇이 직장 생활하면서도 재현되는 것 같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말로 쉽게 상처를 받았다. 팀장님에게 핀잔이라도 듣는 날이면 밤늦게 집에 들어왔다. 다음날 출근한다고 나갔는데 가지 않고 PC방에서 놀다가 회사에서 출근 안 했다고 전화올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


귀공자처럼 예쁘게 잘 자라던 성민이가 유년기를 지나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카프카의 변신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애물단지가 된 기분이었다.  남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중학생이 되어서도 강아지 새끼가 무서워 도망 다니고 물이 무서워 물놀이장에 가서도 놀지 못하고 수업시간이 되어도 들어가지 않고 배회하고 다니는 성민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사행성 게임에 빠져 돈만 있으면 게임으로 날려버렸다. 친구가 없어 외로워하다가 채팅에서 만난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핸드폰으로 대화하는 걸 들어보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면서 잡담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면서 서로 말이 통하고 이해해 주는 친밀한 관계가 되어 의지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부모를 신뢰하기보다 채팅에서 만난 친구들을 의지하고 따랐다. 가상세계와 현실 세계를 ​

구분하지 못하고 핸드폰 게임과 채팅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빠져 버렸다. 그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줘  받지 못하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쁜 친구들을 만나 이용당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적 장애가 있다고 하지만 이렇게 부모말을 듣지 않고 속을 썩일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성민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외계인과 사는 것 같았다.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다. 남들에게 자랑은 못할망정 부끄럽지 않은 평범한 아들만 돼도 좋겠는데 수치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성민이가 단순 노동을 하고 얼마 받지 못하는 급여마저도 게임비로 대부분 날려버리고 항상 쪼들리며 궁색하게 사는 모습을 도저히 볼 수 없었던  아내는 비전 있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러던 중 한국 장애인 고용 공단에서 운영하는 직업 능력개발원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장애인을 대상으로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며 기술을 가르쳐주고 취업을 내 보내는 공공기관이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모두 갈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서류심사와 면접을 거쳐서 적격 여부를 검토한 후 선발한다고 하였다.  기술을 배워서 더 나은 일자리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곧바로 서류접수를 하고 면접을 보았다.  면접을 보고 온 아들은  떨어질 수도 있다면서도 속으로는 합격해서 다니고 싶은 기색이 엿보였다. 불안불한했지만 다음날 합격했다는 통지가 문자로 왔다. 아들에게 새로운 길이 열릴 것 같아 기대가 되었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는 2주 전에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만두게 되었다. 그리고 8월 말부터 성민이는 학생의 신분이 되어  장애인 직업능력개발원에 다니게 되었다. 기숙사에서 생활해야 하기에 입교 전날 여행용 가방에 세면도구와 기본적인 옷가지들을 챙겨서  아내와 함께  개발원으로 출발했다. 집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고 수위 아저씨가  신원을 확인한 후 들여보내 주었다. 건물은 대학캠퍼스 같기도 하고 관공서 같은 인상을 받았고 넓고 쾌적한 분위기였다. 숙소 배정을 받았는데 2인 1실이었다. 두 사람이 쓰기에 널찍한 방에 침대와 책상이 각각 놓여 있는 호텔에 준하는 쾌적한 방이었다. 조금 있으니  룸메이트가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왔다. 만나서 반갑다는 인사를 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성민이 보다 서너 살 어린 친구인데 말도 잘하고 인성도 좋고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열심히 배우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안심이 되었다. 지적 장애가 있는 친구지만  정상인처럼 보였다. 성민이도 겉은 멀쩡하지만 지적장애 판정을 받았기에 서로 의지하고 잘 어울릴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우리 부부는 두 사람이 사이좋게 잘 지내며  목표한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위로와 격려의 말을 해주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다시 보자며 개발원을 나왔다.


언제부턴가 성민이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사이버로 매년 의무적으로 들어야 하는 장애인 인식 개선 연수 때문일까? 아무튼 성민이에 대한 긍휼한마음과 이해하려는 마음이 움트기 시작했다.  성민이가 어려서부터 지적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인정하기 싫었다. 겉으로 보아서는 멀쩡했기 애 보통 아이 대하듯  하였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겁이 많은 것을 보면 성격 탓으로 돌리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시간이 갈수록 엉뚱한 행동 - 누군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싫다는 표현을  하지 못하고 몰래 해코지를 함 - 을  할 때가 비일비재했다.  나는 이런 모습을 보고  나무라기만 했을 뿐 왜 그런 행동을 했을까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대안학교에서 중고등 과정을 마치고  집에 와 있을 때 아들은  나에게 심심하다며 친구나 형을 소개해 달라고 애걸복걸할 때가 있었다. 그때도 교회에 나가면 형들도, 친구들도 많은데 무슨 소리냐며 아들의 의사를 묵살해 버렸다. 아마도  자기 수준(지적 수준)에 맞고 말이 통하며 자신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필요했던 모양인데 나는 그것을 캐치하지 못한 것이다. 성민이가 나에게 애물단지가 되게 한 것도 아버지인 내가 자초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지적 장애에 대해 관심을 갖고 깊은 이해와 사랑을 주지 못했던 것이 후회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늦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제부터라도 아들의 모난 행동과 말들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고 관심과 아낌없는 사랑으로 돌봐주어야 할 소중한 존재임을 깨달아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다니고 있는 장애인 직업능력개발원에서는 바리스타 기술, 제과제빵기술, 스마트사무행정, 제조기술 등 다양한 과정들을 가르친다. 성민이가 이곳에서  성실하게  기술을 익혀서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아 사회의 일원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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