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인관계의 이상적인 범위는 어디까지이며 친구란 무엇일까
스무 살이 된 뒤로는 매년 연락처의 번호를 절반으로 줄이는 일을 해왔다. 연초에 연락처 앱을 켜고 올해 연락할 일이 없거나 드물겠다 싶은 번호는 지운다. 이 작업을 매년 해오다 보니 이제는 몇 년 전과 비교해서 1/10 가량의 연락처밖에 남지 않았다. 이런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어느샌가부터 대인관계가 필요 이상으로 넓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무얼 하든 항상 친구들과 같이 했다. 학교에서 항상 보는 친구들과 방과 후에 만나서 놀러 다녔다. 축구에 목숨을 거는 남학생들의 비율이 다른 학교보다 유난히 높은 것 같은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서는 학교에서 축구 시합을 하고, 수업이 끝난 뒤에는 PC방에 가서 축구 게임을 하다가 해가 지고 선선해지는 저녁때는 다시 운동장으로 가서 공을 찼다. 고등학생이 된 이후로는 인간관계의 폭이 훨씬 넓어졌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동아리 활동이 학교 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동아리 해서 만든 포트폴리오로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도 흔했으니까. 하는 일들이란 것은 축제 준비부터 해서 사진 찍기, 수험생 선배들 응원하기, 졸업생 선배들 만나기, 옆 학교 동아리들과 교류하기 등이었다. 그런데 이런 일을 하다 보면 면식이 없는 사람들과 접촉할 일이 많아진다. 다른 학교의 같은 동아리 학생들과 행사를 한다거나, 지자체에서 하는 축제에 참가한다거나, 대학에서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석하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전화기에 연락처들이 자꾸 늘어났고, 그렇게 알게 된 사람을 거쳐서 알게 된 사람들까지 생기다 보니 카카오톡에 사람 이름이 표시되는데 누군지 모르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렇게 지내다 고3이 되고, 이제는 교실에서 친구들과 온종일을 보내는 시간이 이어졌다. 남고생들이 모여서 계속 공부만 하는 건 애당초 불가능하다 보니 교실에서는 여럿이 모여서 떠들며 시간을 보내고, 밤에는 같이 저녁을 먹고 들어가곤 했다. 학교에서 늦게 나와서 달리 들어갈 식당이 없을 때는 편의점 음식을 사서 벤치나 공원에 가기도 했다. 이런 날들이 수능날까지 반복됐다. 수능이 끝나고 나서는 반 학생들이 거의 다 모여서 술집에 갔다. 주민등록증 검사를 꼼꼼히 하는 그 가게는 아직도 방배동에 남아 있다.
나는 정시를 준비하던 입장이라 수능이 끝나고 나니 갑자기 모든 학교 생활이 전부 끝난 느낌이 들었다. 수험 생활을 마쳤다는 느낌도 있었지만 이제 고등학생이 아닌 건가 싶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틀 정도 학교를 나가지 않았었다. 물론 담임 선생님이 찾으셔서 이틀째 오후에는 학교에 나갔었지만, 그때 이후로 유년부터 항상 주변인들과 어울려 다녔던 시기가 끝난 것 같다.
스무 살이 되고 매일 나가던 학교를 가지 않으니 처음으로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 해 2월쯤 문득 지금까지의 인간관계가 내가 원하는 것이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뭐든 혼자 하는 편을 선호한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깊이 생각해 보니 무엇을 하든 항상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했었고, 그 이유는 내가 여러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해서가 아니라 항상 그래왔기 때문이었다. 뭔가를 혼자 해본 경험이 없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니까 소통하는 걸 즐기지 않는 사람이 스무 해를 어떻게 이렇게 살아왔는지 의아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면 바쁘고 정신이 없어서 나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질 여유나 현명함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차에 재수생이 되었는데, 입시학원에는 사교 행위가 없기 때문에 그때 처음으로 혼자 밥을 먹어봤다. 그 순간의 멋쩍은 느낌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입시를 치르며 독립된 시간이 많아지고 바쁘단 핑계로 지인들을 덜 만나게 됐다. 그러다 보니 여유를 부리는 날에도 차츰 홀로 여가를 보내는 일이 늘었다. 그렇게 혼자 하는 것들에 익숙해질 때쯤, 개인에게 적당한 인간관계의 범위는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들과 너무 많은 소통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예를 들면 나는 카카오톡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쉽게 연락을 할 수 있고, 문답이 곧바로 오가기 때문에 거리를 두거나 회피할 수가 없다. 연락이 많이 올 때는 언제 확인하고 답을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부담스러운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같은 이유로 소셜미디어도 하지 않게 됐다. 학교 일에 필요해서 유지하고 있던 페이스북을 탈퇴했고, 그 이후에 나온 소셜미디어들은 가입을 하지 않았다. 가끔은 기술이 발달하기 전 편지로 왕래하던 시대의 소통방식에 더 나은 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가는데 시간이 걸리니 그 사이에 전하고 싶은 말이 쌓일 것이고, 좁은 지면에 전부 담아야 하니 생각은 깊어지고 말은 정갈해질 것 아닌가.
이렇게 늘 주변에 사람이 있던 십 대를 지나, 혼자 시간을 보내는 일이 늘어난 이십 대를 보내면서 인간관계에 대한 생각은 차츰 변해 갔다. 한정된 시간을 어떤 이들과 보내는 것이 좋을지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특히 내 나이대까지도 친구란 또래 집단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또래 집단에서 어울릴지는 자신이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가정에서 고른 지역에 자리를 잡고, 그곳에 있는 교육 기관을 거치며 또래들과 어울리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교우 관계란 내 선택이라기보다는 환경의 선택 -주로 부모가 결정하는-이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는 내가 속한 또래 집단이 나와 맞지 않을 수 있다. 스스로 속하기를 자처한 집단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편입된 집단이기 때문에 가치관이나 성향, 기호가 어울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내 경우가 그랬던 것 같다. 내가 자란 지역의 내 또래들이 가정에서 보고 배우는 가치관은 내가 가정이나 책에서 받아들인 가치관과는 통용되지 않는 일이 많았다. 유년 시절과 성장기를 보낸 곳을 지금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하게 경쟁적이고 능력주의적인 환경이었다. 경쟁에서 승리-그 경쟁이 공정하든 공정하지 않든 상관없이-해서 물질적인 보상으로 그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가 모인 곳은 내게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평생 그 나무들 틈을 헤매느라 숲을 보지 못해서였겠지만, 내가 왜 견디기 어려웠는지 진작 알아차렸다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도 좋았을 것 같다.
전술한 대로 이십 대에 들어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뒤로 평소의 나라면 하지 않을 선택을 하나 했고, 그 선택이 삶에 꽤 큰 변화를 가져왔다. 유시민 작가의 팬 클럽에 가입했다. 가입인사를 써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내가 올린 가입인사는 그 후 몇 주 동안 웹페이지에서 조회수와 댓글이 가장 많은 글이었고, (물론 내가 글을 잘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건 공정치 못한 주장이다. 유작가가 정치를 은퇴한 뒤로 팬 클럽 회원들의 공식 홈페이지 활동이 예전만큼 활발하지 않은 것이 가장 주효하다.) 처음으로 나간 오프라인 모임에서 가입인사 잘 읽었다며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많아서 대화를 이어나가기가 수월했다. 팬 클럽에도 여러 작은 집단들이 있어서 내가 나간 모임은 20,30대들이 모인 곳이었지만 스물한 살이었던 나보다는 다들 훨씬 연배가 있었다.
그들과 친해졌다. 모여서 토론을 하다가 저녁 때는 술집에 가기도 했고, 그 안에서 커플이 생기는 걸 구경하기도 했다. 학원에 들어앉아 있느라 참여하지 못한 여름 행사에 유작가가 나타나서 노래를 부르는 영상(그는 노래를 정말 못한다)을 보면서 학원을 빠지고서라도 갔었어야 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서초동 집회에 나갔고 나는 갈 수 없는 상황이었을 때는 일정이 끝나고 저녁 식사 자리에 참석했다. 집회에 모인 사람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지인들만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인근의 식당과 술집이 가득 찼다. 처음 보는 중, 장년의 아저씨들이 젊은 사람이라고 붙잡아놓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도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일이 드물지만, 즐거웠다. 가장 큰 이유는 마음이 편했기 때문인 것 같다. 평소 시끄러운 환경을 매우 꺼리는데, 내가 좋아하는 인테리어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 나오는 레스토랑에 갈 때 보다 가치관이 맞는 사람 들과 시끄러운 고깃집에 갈 때가 마음 편했다. 그때부터인가 나는 가치관과 정서가 어울리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코로나 이후로 만나는 빈도가 많이 줄었지만 요즘도 가끔 만나고, 특히 경조사가 있을 때는 다들 모이는 편이다. 어떤 관계를 집어 친구라고 부르는지, 친구란 어때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며 지내야 할지는 마음속에서 결정 지은 것 같다.
몇 년째 이어오고 있는 독서모임도 이 모임의 인연과 관련되어 있다. 모임에서 만난 분이 홍대에서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며 초대해 주셨었다. 시간이 허락지 않아서 여러 차례 고사하다가 세 번째엔가 더 이상 거절하는 것이 면구스러워 모임에 들었는데, 마침 그분이 하시는 모임이 그 달에 일시적으로 폐지됐고, 취소를 할까 고민하다가 임시로 든 독서모임이 여태 유지되고 있다. 급변하는 생활 패턴을 달가워하지 않아서 관성적으로 참석하는 것도 있지만 관계가 마음에 거슬리지 않아서 유지하는 것도 크다. 아무래도 휴일에 모여 주식이나 코인 얘기를 하는 것보다는 책 얘기를 하는 쪽이 내게 적합하다.
친구를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분이 있다. 가장 친하거나 정말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여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게 꽤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분이기 때문이다. 유시민 작가의 팬 클럽에서 만난 나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은 여성(누나라고 부른다)의 남편인데, 또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커플이라 그분은 나와 서른 살 넘게 차이가 난다. 내 어머니와 같은 연배다. 그분도 팬 클럽 회원이라 모임에 가끔 나오시지만, 사업을 하시는 분이라 누나처럼 활발히 나오시지는 않았고 누나를 처음 알게 된 후 한참 뒤에야 처음 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분을 떠올린 것은 서른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말 진솔한 소통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나는 논쟁을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좋아한다기보다는 피하지 않는다는 편이 맞겠다. 아닌 건 아니라고 따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성격이 유해져서 많이 덜하지만 당시에는 훨씬 더 날이 서 있었다. 좋게 말하면 냉철하고 나쁘게 말하면, 아니 나쁘게 말할 것도 없이 그냥 성격이 나빴다. 그래서 나이가 얼마나 차이 나든 할 말은 여과 없이 하던 시절이었는데, 그분은 한 번도 나의 태도에 기분 나빠하신 일이 없다. 그 모임에는 원래 논쟁이 잦다.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자세하게 들어가면 다른 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그 분과의 논쟁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성격에 비슷한 면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논쟁을 꺼리지 않고 냉소적이라는 면이 좀 닮았던 것 같다. 언성이 좀 높아지고 서로 짜증을 낼 정도로 논쟁이 격해진 일도 잦았다. 그분은 나를 이름으로 부르시거나 너라고 하시다가 논쟁이 격렬해지면 "당신이~" 하고 부르셨다. 둘이 자주 이래서 주변 사람들이 장난으로 지겨우니 그만하라고 말리기도 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격한 언쟁을 벌이다가도 잔을 들며 웃었다. 기분이 나쁘거나 불편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고 유쾌했다. 그분도 즐거워하셨던 것 같다. 모임이 끝나면 나와 이야기하는 게 재밌으셨다고, 가끔 집에서 내 얘기를 하신다고 누나가 전해주었다. 그분은 내가 논쟁을 할 때 고전을 인용하거나 시시콜콜한 잡학을 늘어놓으면 네 나이에 어떻게 그런 걸 아냐고 재미있어하셨고, 나는 서른 살이 넘게 많은 어른과 소통이 되는 것에 신기해했다. 부모님을 물론 좋아하지만 대화는 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모님 연배의 다른 어른들은 말할 것도 없다.
워낙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내가 먼저 친구라고 관계를 규정하기는 좀 송구스럽다. 다만 그 분과 나눈 대화들이 퍽 신선하고 즐거웠고, 무엇보다도 내가 나중에 서른 살 어린 사람과 이렇게 소통할 수 있을까 자문해 보면 영 회의적이기 때문에 특별한 기억으로 가지고 있다. 특별한 기억이라고 표현하는 이유를 하나 덧붙이자면, 이제 그 분과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몇 해 전에 지병으로 작고하셨기 때문이다. 이십 대 초반이라 상가에 갈 일이 드물었다. 검은 정장이 없었다. 친한 지인의 남편이 돌아가신 것도 처음이었다. 장례식장에 가서 이미 흘릴 눈물을 다 흘린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누나의 손을 잡은 날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아쉬운 인연이다. 밥이고 술이고 많이도 얻어먹어서 갚아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게 됐다. 감사하고 죄송스럽다. 이 글은 오래 두지 않고 지워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