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된 기타
물질적으로 풍족해지고 소비재가 넘쳐난 것이 한 두 해 일이 아닌만큼 요즘 세상에는 애장품이랄 것이 드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202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1인당 명품 소비액은 약 325달러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이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말하면 어르신들이 지팡이 대신 짚고 다니시는 유모차까지 명품이 된 판국이라, 꼭 비싼 물건이라고 애장품이 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다면 내게 애장품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을까 생각해보다 곧 기타 생각이 났다. 스무 살 즈음 사서 여태 가지고 있는 기타다. 소비 취향이 확실해서 다른 것들도 여럿 생각이 났지만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역시 이 기타 소비재가 넘쳐난 것이 한 두 해 일이 아닌만큼 요즘 세상에는 애장품이랄 것이 드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무 살 즈음 사서 여태 가지고 있는 기타다. 소비 취향이 확실해서 다른 것들도 여럿 생각이 났지만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역시 이 기타를 골라야겠다. ESP사의 검정색 어쿠스틱 기타다.
중학교 3학년부터 기타를 쳤다. 음악을 좋아하다보면 직접 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고, 가장 쉬운 접근법은 역시 기타다. 많이들 연주하기도 하고, 다재다능한 악기니까. 아버지가 처음 사주신 기타가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는게 없어서 조율을 한답시고 줄을 끊어버린 때 부터 기타로 작곡을 하기까지 시간도 많이 흘렀고 에피소드도 많았다. 중학생 때 산 기타는 친구에 주어 버렸고 고등학생 때 산 기타는 관리를 제대로 할 줄 모르던 때라 목이 좀 휜 채로 잘 있다. 악기를 연주하다 보면 장비병이 생기기 십상이라 자주 쇼핑몰을 들여다 봤었는데, 스무 살 봄 무렵에 발견한 모델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색상, 형태, 프렛의 수, 사용한 목재 등 전부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서 이건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럴 수가 없었다. 품절이라고 되어 있어 홈페이지에 문의를 해보니 현재 생산 중에 있고, 언제 입고 예정이라는 대답을 받았다. 그래서 예약을 하고 이메일을 몇 차례 주고 받다가 거의 일 년이 지난 후에 기타가 집에 도착했다. 왼손에 잡히는 넥의 느낌이 기억에 남는다. 처음 시도한 곡은 당시 자주 듣던 일본 밴드, RADWIMPS의 "아무것도 아니야"였다. 그날 이후로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기타를 쳐서, 지금도 별 생각없이 기타를 잡고 있을 때는 손이 알아서 이 곡을 따라간다. 이 기타는 반려동물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그 뒤로 기타를 더 들였지만, 합주를 하거나 남들 앞에서 연주를 할 때는 거의 이 기타를 챙겨갔다. 나와 가장 잘 어울리는 기타라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사실 나한테 좀 과분한 물건이라 잘 어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울린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내게 어울리는 기타라고 여기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첫번째는 소리다. 현악기는 나무의 속을 비워 만든다. 현을 뜯으면 울림통이 공기를 흔들어 소리를 낸다. 전자 기타가 아닌 어쿠스틱 기타는 이 울림통으로만 소리를 낸다. 그런데 이 기타는 세미 할로우 어쿠스틱 모델이다. 속이 비긴 했는데 좀 덜 비었다는 의미다. 앰프 없이도 소리가 나지만 보통의 통기타들보다는 음량이 작다. 그리고 더 단단한 소리가 나고 고음이 부드럽다. 울림이 과하게 크지 않은 점, 음이 흔들리지 않고 단단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두번째는 형태다. 나는 손이 작아서 넛 폭(첫 프렛부터 줄이 걸쳐있는 부분의 너비)이 좁은 모델이 편한데, 이 기타는 42mm로 어쿠스틱 기타 중 굉장히 좁은 편에 속한다. 덩치가 너무 크지 않고 바디가 날씬한 것도 마음에 들어서 기타를 안고 있으면 마음에 안정이 좀 온다. 기타가 있는 분이라면 현을 하나(혹은 몇 개든) 뜯고 울림통 위에 손을 올려보는 것을 권한다. 그 진동의 주파수를 느끼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타는 진폭이 크지 않고 단단하다. 일상의 진폭, 마루와 골의 차이가 크지 않은 나에게 적합한 악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소리를 내주는 악기로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는 건 기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무 짙은 감수성을 가진 음악은 듣기에 거북하다고 느낀다. 가사나 멜로디, 코드의 진행이 과하게 감정적이라고 느껴지는 곡들을 잘 듣지 않고, 보컬도 중성적인 목소리를 가진 가수를 좋아한다. 밴드 "쏜애플"의 노래들을 고3때 처음 알게 된 후로 여태 듣고 있다. 사람이 애장품을 닮는다고 하는 이유는 심리적, 감정적, 그리고 인지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주 애장품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거나 개성을 드러내려는 경향이 있다. 가장 좋아하는 것이 뭐냐는 질문에 어렵지 않게 음악을 고를 것 같은 나에게 나의 취향을 음악으로 출력해주는 이 악기야말로 애장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람을 알고자 할 때는 그 사람의 서가와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보면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옳은 말이다. 내 생각은 거의 서재에서 나오고 정서는 듣는 음악에서 나오니까. 다른 악기를 더 들였을 때도 이 기타만큼 마음에 들었던 적은 없는걸 보니, 앞으로도 쭉 가지고 가지 않을까. 이 글을 읽는 분이 계시다면 자신의 애장품은 무엇이고, 정서나 가치관과 부합하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해 봐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