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립다'는 '그리다'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머릿속에 그려보고 싶은 것이 그리운 것이고,
그려 보려면 기억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작은 것들까지, 혹은 작은 것들만.
평범하고 소소한 기억들을 낱낱이 기억해 떠올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누군가를, 어딘가를, 그 어느 한 때를 그릴 수 있다.
겨울의 초입, 한 해의 끄트머리
이맘때는 누군가를 그리기 좋은 계절이다.
아버지가 퇴근해 오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첫눈이 감질나게 뿌리는
흐린 겨울날 저녁에는
아버지가 퇴근해 오셨으면 좋겠다
홈스방 코트 단추를 단정히 여미고
굽 갈 때가 지난 금강구두 끈을 바짝 조인 채
아륙 20번 버스에서 내려
은행을 까고 밤을 굽는 리어카의
카바이드 불빛을 지나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막다른 골목 끝 요비린을 누르면
뛰어나가 빗장을 풀고
묵직한 나무 대문을 열어 드리고 싶다
아버지의 찬 손에 단내 나는
태극당 봉지가 들려 있을지도 모른다
예배당마다 알록달록 전구를 매달고
구세군 냄비가 새빨갛게 흔들리는 허름한 도시
동지가 아직 보름은 더 남았어도
일찌감치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면
이제 곧 아버지가 퇴근해 오실 것 같다
돌아와 외풍 심한 안방에 들어
길이 잘 든 티크 장롱에
소맷부리 희끗해진 양복을 벗어 걸고
두툼한 내복과 파자마 바람으로
모란꽃 그림 요란한
양은 소반 앞에 앉으셨으면 좋겠다.
반짝반짝 광을 내놓은 은 젓가락으로
알 밴 생태탕 가시를 발라 드셨으면
잘 익은 지레김치 흰 줄기를 찢어 드셨으면
별말씀은 없으셔도 좋을 것 같다
가족이 모두 각자의 방에 깃들고
나의 병이 홀로 깊어 가는 겨울밤이면
자꾸만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음이 서성인다.
돌아가신 지 이미 10년
퇴직하신 지 30년은 된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기를 기다리나 보다.
새삼 새삼 기다리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