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색 초상
아버지의 이 과감한 분홍색 사용은 어머니의 영향이다.
이북이 고향이셨던 어머니의 진달래에 대한 집착은 병적인 것이어서, 어머니는 마당에 반드시 진달래꽃이 피어야 기운을 차리셨다. 어린 시절 마당에는 진달래꽃이 가득 피었었다고 늘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이북의 상징인 진달래꽃을 너무나 좋아하셨지만, 자신이 이북 출신이라는 것을 마치 절대로 누설하면 안 되는 비밀처럼 여기며 두려움 속에서 사셨다.
나는 유럽에서 30년 이상을 산 사람이지만 나의 집, 나의 뿌리, 나의 고향은 언제나 대한민국이다. 이것을 떳떳하게 말하면서 마음껏 그리워하고, 내 고향의 좋은 점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은 나의 인생에 있어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어떤 어린 시절과 과거를 보내셨는지 모르지만, 이북에서의 유년 시절과 진달래에 대한 집착과 향수를 마치 비밀처럼 마음속에 간직하셔야 했다.
대한민국의 슬픔은 바로 이것인 것 같다.
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어릴 적 고향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또 슬픈 근대사로 인해 일본, 러시아, 중국, 미국 등이 나라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그 어떤 편에 서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모두가 반역자'이자 '모두가 애국자'인 나라가 되어버린 혼란이 바로 대한민국의 슬픔이다.
평생 몸무게가 40kg을 넘는 것이 소원이었던 나의 어머니를 위해 아버지는 항상 분홍색 그림을 그려 선물하셨는데, 어머니의 환호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것만 같다.
"우아... 너무 예쁘다... 진달래가 활짝 피었네..."
어째서 격자 모양인가.
격자(Grid)는 질서와 기억의 지도처럼 보인다.
격자는 혼란스러운 기억들을 정리하는 삶의 이정표이자 '지도'와 같다.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는 길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 같고, 흩어져 있던 어린 시절의 파편들을 하나의 질서 안에 모으려는 노력같이 보인다. 만남의 광장처럼 가로선과 세로선이 만나는 지점들은 사건과 기억이 교차하는 순간들만 같다. 아버지는 이 교차점마다 진달래색을 더욱 짙게 칠함으로써, 고향에 대한 기억이 가장 강렬하게 살아 숨 쉬는 지점들을 표시하신 것 같다.
어머니의 고향에 대한 기억은 아름다움과 두려움, 그리고 혼란과 가치관의 충돌로 가득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평생 우울증과 조울증, 신경쇠약 등에 시달리신 것은 아마도 이북에서 보낸 아름다운 기억 속에 말할 수 없는 아픈 기억도 함께 있다는 것을 항상 우리에게 암시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어머니를 이해하고 사랑했던 아버지가 그릴 법한 그림이다.
어머니의 아픈 기억과 대한민국의 혼란스러운 근대사를 아름다운 격자로 승화시킨 것만 같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4일 간격으로 하늘나라로 같이 소천(召天)하셨다.
이 그림은 청주 쉐마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