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옛날 단독주택이었던 우리 집엔 쥐가 들어오는 일들이 있었다.
마당이 있었고 아직도 차가 많이 지나던 시절도 아니도 지금 6호선이 지나다니던 곳에는 논과 밭이 있었고 개천도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옛날 집엔 가끔 쥐들이 들어오곤 했다.
아버지가 충남 공주교육대학에 계실 때는 교통이 지금처럼 좋을 때가 아니었기 때문에 2주 만에 한 번씩 집에 오시는 일도 많았다.
어머니는 쥐를 많이 무서워하셨기 때문에 우리 네 자매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 것인지 의논했다.
아침마다 부엌에 들어가면 쥐들이 난장판을 해 놓은 쌀들과 음식 찌꺼기들이 바닥에 널려 있었다.
아버지는 시골에서 크신 분이라서 이런 상황에 어떻게 해야 할지 잘 알고 계셨다.
우리에게 일단 쥐들이 들어올 것 같은 구멍을 모두 막고 쥐 덫을 놓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큰 언니가 동내 철물점에 가서 쥐덫을 사 가지고 왔다.
그리고 내가 먹고 남은 부대찌개의 소시지를 건져서 쥐덫에 달았다.
둘째 언니는 철공소에 가서 시멘트를 사다가 쥐가 들어올 것 같은 구멍을 모두 시멘트로 막았다.
어린 동생은 쥐 때문에 신경쇠약이 온 엄마를 위로하는 일을 했다.
드디어 쥐덫을 온 집안에 놓고 월요일이 되어 학교에서 집으로 왔을 때 어머니가 급하게 소리 지르시며 나를 부르셨다.
"쥐 덫에 걸렸는데 1시간 전부터 저렇게 꾁꾁 거리고 있어."
쥐 소리가 나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10살 때의 일이다.
부엌에는 생쥐가 덫에 목이 끼어 찍찍거리고 있었다.
" 이제 어떻게 하지?"
어머니는 어린 시절에 집에 어머니를 돌보는 여자가 따로 붙어 다녔고 집에서 일하던 사람들만 20명이 넘는 집에서 크셨다.
육이오 공산 형명과 와 월남으로 (어머니는 이북 분이시다) 모든 것을 다 잃으셨지만 그 이후에도 고등학교의 음악 선생님으로 일하시고 또 합창 지위와 오페라 독창 등으로 돈을 버셨던 분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농부의 피를 전수받은 우리 네 딸들이 나설 수밖엔 없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말했다.
"엄마, 연탄집게 어딨어? 그리고 마당에 물통에 물 받아놔."
어머니가 급하게 나가서 물통에 물을 받으시고 나에게 연탄집게를 가지고 오셨다.
나는 연탄집게로 쥐가 물린 쥐덧을 통째로 들었다.
너무 무거워서 두 손으로 겨우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마당에 어머니가 받아놓은 물통에 통째로 집어넣었다.
30초도 되지 않아 빙빙 물속에서 돌던 쥐가 멈추었다.
워낙에 동물을 좋아하는 나는 이 사건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쥐도 먹고살려고 부엌에 들어와서 남은 음식 먹은 것인데...
같이 공존해서 살 수 없는 존재의 영역에 들어왔기 때문에 나는 이 쥐를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천천히 나에게 오셔서 말했다.
" 이제 어떻게 하지?"
"조금 더 기다렸다가 버리면 돼."
이때 둘째 언니 jee 언니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 물에 빠진 쥐를 보며 말했다.
"불쌍하다. 윤신이 네가 죽였어?"
나는 살해자의 오명을 벗으려고
" 쥐덫에 걸려서 목이 부러진 것 같았어"
그렇게 말했다.
언니가 물을 버리고 고무장갑을 끼고 쥐와 쥐덫을 분리했다.
그리고 쥐덫은 또 쓰기 위해 베란다 해볓이 비치는 곳에 놓았다.
큰언니가 집에 도착했을 때 집안은 다시 조용한 상태였다.
막내와 어머니는 이불에 누워있고 jee 언니는 마당의 한구석에서 나무에 조각을 하고 있었다.
큰언니에게 내가 쥐를 잡은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이렇게 소란스러운 일이 있으시면 신경쇠약 증세로 이불에서 못 일어어나고 누워 계셨다.
큰언니가 학교에서 오자마자 가방을 놓고 교복을 벗고는 (큰언니는 이화 고등학교를 다녀서 교복을 입고 다녔다. 언니가 하얀 교복을 입은 예쁜 모습이 아직도 생각난다.) 금방 부엌으로 들어가 저녁상을 차렸다.
어머니가 누워계신 안방에 상을 차리고 모두 저녁을 같이 먹었다.
내가 저녁을 먹다가 수저를 놓고 Jee 언니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 기억난다.
" 다음엔 언니가 죽여. 내가 뒷정리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