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장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고 남편의 손을 잡는 결혼식...
나는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고 그냥 살고 있는 유럽여자이다.
30년 넘게 유럽에서 살았으니
나는 유럽여자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부모님과 어린 시절 그리고 한국어가 내 혈관 속을 흐르고 있으니 또 한국 사람이다.
나는 아버지의 손을 놓고 독일로 날아갔다.
아직도 최루탄의 연기가 끊일 줄 모르는 90년대 초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청문화와 모래시계가 TV 속에서 국민들에게 "변화"를 조금씩 인지 시킬 때 나는 한국을 나왔다.
아버지가 나에게
"여자라고 못할 것은 이 세상에 없다. 훨훨 나아라"
이 말씀은 내가 독일로 가서 생활하는 동안 나에게는 항상 마음속의 디딤돌이 되었다.
23세...
독일의 바우하우스 대학에 전 장학금을 약속받고 갔다.
지금의 GZD 시험 (독일어 인증 시험)에 최고 단계 시험을 통과하고 입학원서를 낸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나에게는 여러 가지 특혜가 주어졌다.
정말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성함도 모르는 외 할아버지를 닮아서 언어에 많은 능력이 있다.
이북에서 외교를 담당하시던 외 할아버지는 중국어, 일본어, 영어를 모두 유창하게 하셨다고 어머니가 항상 나에게 말씀하셨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과 외갓집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에게는 완전한 타부 (Taboo) 이였기 때문에 나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 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어쨌든 내가 4 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면서 라디오 채널 바꾸듯이 언어를 바꾸어 말할 수 있는 것은 외가 쪽의 DNA라고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동의하신 일이다.
처음 독일로 가서 있던 집은 편지로만 연락을 주고받던 한 은퇴하신 독일 아주머니의 집의 다락방이었다.
오래된 독일 옛 건물이었던 이 집의 다락방은 따듯하고 넓었다.
내 방에는 편한 침대와 책상 등 기본적인 가구만이 있었다.
이 Lorena 아주머니는 아들만 8명을 가지신 분이셨다.
그리고 오래전에 과부가 되어 이제는 이 커다란 집에서 홀로 생활하고 계시던 분이었다.
오래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이 집에 나를 반기고 있던 것은 이 집의 막내아들 Holger였다.
오후 5시쯤 3월의 아름다운 독일의 저녁노을이 찻잔에 길게 그림자를 만드는 이 시각에 원탁 테이블에 꽃그림이 수놓아져 있는 독일 전통 꽃무늬 식탁보가 깔린 식탁에 차와 과자를 놓고는 나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Guten Tag"
내가 인사하자 곱슬머리 갈색머리에 청명한 파란 눈을 가진 이 청년이 나에게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 Guten Tag, 어머니가 한국에서 학생이 온다고 나보고 과자 주라고 하셨어요. 지금 잠깐 아르바이트하러 나가셨으니 좀 기다리세요"
수즙은 듯 어색한 듯 천천히 독일어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 아네... 감사합니다. 제가 있을 방을 우선 좀 보여 주시면 짐을 넣어놓고 기다리겠습니다."
내가 유창하게 독일어를 하자 마음이 놓인 것 같이 활짝 웃으면서 홀거 (Holger)는 나를 다락방으로 안내했다.
8명의 형제가 같이 큰집답게 집은 정말 어마어마하게 컸다.
큰 짐을 들어주면서 나를 다락방으로 안내하던 홀거가 갑자기 층계에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우리 어머니만큼 용감한 분이네요... 이렇게 멀리 혼자 왔으니..."
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 멀리 왔는대도 집처럼 편하네요. 감사합니다."
짐을 내려놓고 나는 다시 부엌으로 내려와 식탁에 앉았다.
저녁노을이 붉게 창으로 보이고 찻잔에 다시 긴 그림자들을 술렁이게 했다.
나는 찻잔을 들고 마시면서 이야기를 꺼냈다.
"언제까지 계속 추울까요..."
" 사실 이곳은 날씨를 예측하기 좀 어려워요. 추웠다가도 다시 따듯한 날도 오고 또 따듯했다가 금방 추워지기도 하고..."
" 한국은 이제 봄이 오고 있거든요..."
내가 벌써 향수에 빠지는 것 같이 보이자 홀거가 나에게 과자를 권했다.
" 어머니가 만든 과자예요. 나도 집을 멀리 나가서 일해봐서 아는대요... 처음에만 그렇지 시간이 지나면 현재 사는 곳이 집이 돼요. 저는 수도시설 전문가 자격증을 17살에 따서 그때부터 계속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기술을 배우면서 일했어요. 지금은 내 개인회사를 운영하는데 아직 마음에 드는 집을 못 샀고 어머니가 혼자 사셔서 이 집으로 당분간 들어와 살고 있어요. 앞으로 계속 집에서 봐요."
이때 문이 열리면서 Lorena 아주머니가 들어오셨다.
키가 크고 통통한 금발의 이 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나를 반겼다.
" 드디어 기다리던 Shini 가 왔네... 여행은 불편하지 않았어?"
계속 독일어로 편지를 주고받던 이 아주머니는 나를 옛날부터 잘 알던 친구처럼 끌어안으며 반겼다.
언어라는 것이 이렇게 사람을 연결하는구나...
그때 새삼 다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