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용진 Oct 16. 2024

21. 그날이 도적같이 임하리니

ㅡ조르주 데 라 투르, <콩을 먹고 있는 시골부부>


'국민내일 배움 카드'를 발급받았다. 나라에서 일정금액을 내주고 자격증이나 기술을 배우는 기회를 주는 복지카드이다. 이젠 아이들도 다 컸고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무언가를 배우고 싶어,  알아보니 나라에서 준비한 혜택이 있었다. 


'한류' 파도를 타기 위한 자격증

우선 한식조리사 자격증 과정을 등록했다. 수십 년 동안 부엌에 있었지만, 나물이며 찌개, 국 등은 어깨너머로 배웠기에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배워보고 싶었다. 

학원에 가장 먼저 도착해 자리를 잡고, 엄청난 집중력으로 수업에 임했다. 아침 9시에 시작하는 실습은 오후 2시쯤에 끝난다. 수업 내내 서 있었다. 쉬는 시간도 많지 않았다. 집에 돌아오면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다. ‘에고고’ 하면서 누울 자리부터  보게 된다. 하지만 다시 실습장에 들어서면,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올지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던 어느 위인처럼  비장한 각오로 칼을 잡곤 한다.


몇 년 후, 퇴직하게 될 남편은 얼마 전부터 연구실을 얻을까 아님 귀농을 할까, 유튜브와 책을 들여다보며 미래설계 중이시다. 평생 가르치는 직업에 몸 담아 온 남편은 기본적인 생활지식은  ‘일자무식’에 가깝다. 앞으로 함께 보낼 시간들이 살짝 걱정이 되기도 한다. 

일주일 단위로 미래 설계도가 바뀌는 것을 보니, 남편은 아직 길을 잡지 못한 듯하다. 눈앞에 다가올 큰 파도를 앞두고, 마냥 ‘어떻게든 살아내겠지.’하기에는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충분치 않은 것은 불편한 사실이다. 그렇기에 작은 청사진이라도 그려본다.


나의 계획은 한식조리사 자격증, 그리고 한국어 교사 자격증을 따서 ‘한류’라는 파도에 이 한 몸  실어 보는 것이다. 우선 집을 정리한 후 (한 살이라도 두 다리가 건강할 때 ) 유랑하며 세상을 돌아볼 생각이다. 이 도시 저 도시를 옮겨 다니며 ‘한국어 선생님’이 되어  외국인에게 ‘한류드라마’에 나오는 음식을 소개하고 함께 만드는 일을 할 계획이다.

별 '베짱이 같은 노후 설계'라고, 그것도 계획이냐고 비웃음 세례를 받을지 몰라도 생각만 해도 설레고 흐뭇해진다. 낯선 곳에 살다가 가진 것 다 털리고 돌아올지도 모르지만, ‘베짱이 계획’대로 살 수만 있다면, 콩만 먹고살아도 배부를 듯하다.

하지만 구체적인 계획 없이 떠났다가는 큰 낭패를 볼지도 모를 일이다. 프랑스의 화가 조르주 데 라 투르(Georges de La Tour, 1593~1652)의 그림에서 만난 어느 노부부처럼 말이다. 

조르주 드 라 투르, <콩을 먹고 있는 시골부부>,. 1620. 캔버스에 유채. 76.2x 90.8cm,  베를린 국립 회화관 소장


그림 속의 노부인이 들려준 말

허름한 옷을 입은 노부부가 작은 그릇에 담긴 노란 콩을 먹고 있다. 그들에겐 식탁도 허락되지 않았다. 지극히 겸손한 먹거리를 손에 들고 편하게 앉지도 못하고 선 채로 주린 배를 채우고 있다.

한 수저 가득 콩을 담고 입을 벌린 노파의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하다. 녹록지 않은 세월을 살아낸 흔적이 그녀의 목에 새겨져 있다. 목주름 사이에 굵게 돋은 핏줄은 여인이 걸어온 힘든 여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함께 서 있는 남자도 모습이 남루해 보이기는 마찬가지다. 지팡이와 배낭을 내려놓지 않은 채  보잘것없는 콩 한 접시를 보는 그의 모습은 편치 않은 세월을 살아온 게 분명하다. 등에 진 배낭은 기거하는 곳 없이 부초처럼 떠도는 삶을 산 증거물 같다. 


이 그림은 라 투르의 <콩을 먹고 있는 시골부부>다. 뛰어난 인물 묘사와 심리 묘사가 돋보이는 초기 작품이다.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미술을 대표하는 라 투르는 비록 지금은 이름도 생소하지만 당대에는 루이 13세가 작품을 구입해서 궁정에 걸어둘 정도로 성공한 화가였다. 활동 초기에는 주로 풍속화 등을 그렸지만 화가로 명성을 얻은 후에는 숭고한 종교화에 매진하였다. 


그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이는 숭고함이나 극적인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주름으로 깊게 파인 노부부의 얼굴에는 인간이기에 맞이해야 하는 쇠락의 모습이 적나라하다. 명암 대비가 선명한 두 사람의 모습은 너무도 사실적이어서 숨이 막힐 정도이다. 


라 투르는 촛불을 사랑한 화가였다. 그래서 촛불을 이용한 빛과 어두움의  묘사에는 누구보다도 솜씨가 뛰어났다. 숨이 멎을 듯한 침묵의 순간을 빛의 고요함으로 극화하곤 했다. 촛불의 고요한 빛으로 인간을 내면을 승화시킨 작품 앞에 서면 누구라도 그 신비한 빛에 거룩해지고 만다.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우러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라 투르를 ‘촛불 화가’라고 불렀다. 






이 그림에서 촛불은 보이지 않지만 노부부의 얼굴의 빛을 통해 촛불을 느낄 수 있고, 불빛이 만드는 명암에 의해 인물의 미묘한 심리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남자는 눈을 내리깐 채 그릇에 담긴 콩에 집중하는 중이다. 반면에, 주름에 덮여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하는 여인은 감상자를 향해 냉소를 짓고 있다. 그림자 속의 눈빛마저 차갑다. 홀쭉하게 꺼진 뺨에서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노년은 어느 날 갑자기 도둑처럼 찾아올 것이니, 단단히 준비하지 않으면 난처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그 누구도 피해 가지 못할 거라고... 



어제보다 가벼워진 발걸음

어제 배운 탕평채를 만들기 위해 장을 보았다. 날이 뭉툭해진 칼을 갈고, 계란을 걸러낼 면포도 뽀얗게 삶아놓았다. 야채를 써는 칼질이 어제보다는 나아진 것 같다. 역시 연습만이 완벽을 만든다. 여인의 냉소에 정신이 든 모양이다. 내일을 향한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함께 듣는 곡>

비틀즈 - When I'm Sixty-Four 


내가 늙어서 머리가 빠지도록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당신은 여전히 나에게 밸런타인 카드와 생일 축하 메시지, 

와인 한 병을 보내주실 건가요? 


만일 내가 2시 45분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문을 걸어 잠글 건가요?

그때도 절 필요해할 건가요?

그때도 내게 밥상을 차려줄 건가요?

제가 64살이 될 때에도요 


당신 또한 늙겠죠

하지만 당신이 말만 해준다면

전 당신과 함께할게요



16세 소년 폴 매카트니가 50년 후 자신의 노년을 상상하며 만든 노래라고 합니다.

미래의 배우자에게 자신이 나이 들어 머리가 다 빠지고 사고를 치더라도 돌봐줄 거냐는 다소 귀여운 내용의 곡입니다. 그는 잔망스럽게 노래합니다. ’ 내가 64살이 되더라도 날 사랑하고 챙겨줄 건가요?’ 라고요.

그러고 보니 폴 매카트니는 무척 조숙한 소년이었나 봅니다.

오래전에 이 노래를 들었을 때는 '멜로디도 사랑스럽고 클라리넷 연주랑 합이 좋네.'라고만 생각했더랬지요.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어느덧 노년을 생각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쿵작 쿵짝 동요 같다고 생각했던 노래가 이제는 듣고 있으면 마음이 촉촉하게 젖어옵니다.

아아, 나는 64세가 되어도, 74세가 되어도 누군가를 조금은 필요로 할 것이고, 그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릴 것 같습니다.

그 나이가 되면, 콩만 먹어도 맘 편하게 살 수는 있을까요?


https://youtu.be/wUDRIC5RSX4?si=mNpzgziOg4TJNhpc

매거진의 이전글 20. 여자에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도 사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