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상벽의 모계영자도
“이눔의 기지배 들어오기만 해 봐. 내 오늘 아주 아작을 내버릴 테니까”
둘째가 ‘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밤 11시가 다 되어 버스를 타고 귀가한다고, 12시 전에는 도착할 수 있을 거라며 연락이 왔었다. 늦은 시간이라 30분이면 귀가하고도 남을 시각인데 자정을 한참 넘어 새벽 1시가 되어도 아이는 들어오지 않았다.
불안한 마음에 애간장이 다 녹을 지경이다. 몇 번이고 전화를 해봐도 ‘지금 고객님께서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야속한 멘트만 들려온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단단히 다짐을 받았건만 ‘이 망할 기지배’는 멋지게 약속을 ‘또’ 어기고 말았다.
사춘기를 여러 번 겪은 언니에 비해 둥글둥글 순하게 지나가 주어 마냥 편한 딸이었던 둘째는 대학생이 된 후 변했다. 내 명을 단축시킬 만한 사건을 척척 저지르며 속을 썩였다. 한 달에 한번 꼴로 술만 먹으면 정신을 잃고 행방불명에 돌입했다. 이번에도 술이 잔뜩 취해 버스에서 잠이 들어 버렸나 보다. 그럴 때마다 ‘위치 추적이라도 해놓을 걸….’ 하고 후회하지만 부질없었다. 남편이 알면 야밤에 큰 난리가 날 일이었다.
몰래 딸아이를 찾으러 나섰다. 그런데 어느새 따라 나온 큰 딸 세원이가 앞을 가로막았다. 혹여 엄마가 놀란 가슴으로 운전하다가 사고라고 낼까 봐 자동차 키를 뺏고는 집에서 기다려 보라고 신신당부했다.
한 시간이 되었을까,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동생을 용케도 찾아왔다. 맘껏 등짝이라도 후려치고 싶었는데, 세원이가 말렸다. “술에 취했으니 깨면 혼내세요.”라며, 주정뱅이 동생을 데리고 들어갔다. 엄마가 벌이는 ‘한 밤의 행위예술(마구잡이 폭행)’로부터 동생을 지키려는 배려인 듯하다.
한 어미에게서 나왔어도 어쩜 이리 ‘아롱이다롱이’인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는데, 문득 조선시대 화가인 화재 변상벽의 그림이 떠올랐다.
변상벽, <모계영자도>, 18세기, 비단에 옅은 채색, 101.0 ×50.0m
세로로 긴 화폭 한가운데 바위가 산처럼 늠름하게 솟아있다. 바위의 주변에 핀 분홍찔레꽃 위로 나비와 벌의 날갯짓이 어지럽다. 부지런히 꽃을 찾나 보다.
따사로운 봄날. 바위 아래쪽엔 먹이를 받아먹으려 병아리들이 어미닭 앞에 동그랗게 모여 있다. 부리에 방금 잡은 듯한 벌을 물고 있는 어미닭은 윤기 나는 깃털이 가지런하고 풍성하다. 세밀한 붓질로 화가는 암탉에게 지극히 우아한 옷을 입혀 주었다.
새끼들을 바라보는 동그란 눈이 선하면서도 야무지다. 어미를 쳐다보는 병아리들의 눈빛은 곧 주어질 먹이에 대한 기대로 초롱초롱하다. 꿈쩍도 하지 않고 어미만 쳐다보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세어 보니 여섯 마리. 하지만 이들 외에도 주변에 여덟 마리가 더 있다.
녀석들 노는 꼴이 가관이다. 먹이에는 영 관심이 없고 제 놀기에 바쁘다. 어미 다리를 놀이터 삼아 숨바꼭질을 하는가 하면, 먹는 것도 귀찮아 숨는다는 게 어미 꽁무니에 찾아든 녀석도 있다. 그런가 하면 물로 목을 축이는 녀석, 그 옆에선 하늘을 보고 시를 읊는 듯한 녀석, 벌보다 지렁이가 맛있는지 서로 지렁이를 차지하겠다며 줄다리기를 하는 녀석들도 눈에 띈다.
비단에 그린 병아리들이지만 내 새끼나 닭 새끼들이나 어찌 그리 닮았는지…. 그들의 개구진 모습이 정신없이 아이들을 키울 때의 시간과 징하게 겹쳤다. 그래서 제목이 “모계영자도(母鷄領子圖)”인가 보다.
그림 속 어미 닭의 표정은 지극히 느긋하다. 그 표정이 그림을 평화롭게 만든다. 절대로 화를 내거나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고 한 몸으로 열네 마리의 새끼를 지킨다. 아이가 밥을 먹지 않거나 내가 제시한 길로 가지 않았을 때, 조급했던 내 모습에선 육아의 즐거움라든지 느긋함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변상벽은 도화서 출신의 직업화가였다. 뛰어난 묘사력은 영조의 어진 작업에 참여하게 했다. 그가 그린 사도세자의 초상도 어찌나 실감이 났던지, 왕이 된 정조는 뒤주에서 숨진 아비를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렇듯 그의 그림 실력은 임금도 인정할 만큼 기량이 뛰어났지만, 실상은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말도 심하게 더듬어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꺼려했다. 숫기 없는 아들을 그의 어머니는 살뜰히 챙겼다. 남과 다른 성격에 ‘사람 노릇이나 하고 살까’ 걱정도 되었겠지만 어머니는 아들의 ‘개성’을 존중하며 묵묵히 울타리가 되어 주었다. 덕분에 그는 위대한 화가로 대성할 수 있었다. 그림 속의 암탉은 어쩌면 믿음과 응원을 아끼지 않은 변상벽 어머니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마구 때려주고 싶도록 미웠지만 해장국을 끓였다. 국을 끓이는 손과 마음이 소란하다. 혹시 말 못 할 고민이 있어 술을 마신 것은 아닐까?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인사불성이 되어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을 정말 모르는 걸까? 엄마를 지나치게 믿는 것은 아닐까? 저러다 ‘알콜릭’이 되면 어쩌지? 제 몸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로 술을 마셔대는 딸에 대한 걱정과 분노가 롤러코스터를 탄다.
나에게 귀하디 귀한 존재. 언제나 따뜻한 ‘닭고기 스프’가 되어주고 싶은 어미의 심정을 ‘이눔의 지지배’는 알까?
포근하고 따듯한 시선을 가진 그림 속 ‘암탉'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아침이다.
Pino concerto No.22 in E flat Major, 3rd mov. Allegro -W.A. Mozart
따뜻한 봄날,
따사로운 햇살아래 열네 마리의 귀여운 병아리가 놀고 있는 모습이 연상됩니다.
눈부신 햇살만큼 밝은 웃음소리, 시끌벅적, 뒤뚱뒤뚱 제 놀기에 바쁜 새끼들은 어미 닭 곁에서 마냥 행복한 듯 보이네요.
평온하게 흘러가던 경쾌한 선율은 '곡 중간에 또 하나의 악장'처럼 전혀 다른 분위기와 마주합니다.
활기찬 템포는 우아한 선율에 차츰 그 에너지를 잃어가고, 선율은 곧 '단조短調인 듯하나 장조長調'의 옷으로 갈아입습니다.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선율은 시리도록 슬픈 소리를 냅니다. 그 '우아함'엔 엄마라는 이름에 잃어버린 나의 모습과 육아의 고단함이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의 해맑은 얼굴과 반짝이는 눈을 들여다보면 다시 리셋!
'번아웃'은 남의 이야기인듯 , 폭발적인 활력과 환희가 뒤따릅니다.
https://youtu.be/rNeuVVhy5iQ?si=MjMewA1nwL2yrY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