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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용진 May 01. 2024

4. 일생일대의 ‘고까짓 사랑’

수잔 발라동, <에릭 사티의 초상>과 에릭 사티, <수잔 발라동의 초상>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휘청거릴 때, 처방약처럼 복용하는 음악이 있다.

 에릭 사티(Erik Satie, 1866~1925)가 작곡한 세 개의 짐노페디(Trois Gymnopédies)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진정제이다. 멜로디를 따라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내 쉬다 보면 내가 무슨 일로 화를 냈는지, 그게 이렇게까지 화를 낼 일이었는지를 잊게 해 준다. 나를 짓눌렀던 일이 ‘고까짓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에릭 사티의 음악은 그 시대가 이해 가기에는 너무 앞서있었다. 그는 “나는 너무 늙은 세상에 너무 젊어서 왔다.”라며 자신이 사는 시대에게 유감을 전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음악만큼 특별한 여인이 있었다. 툴루즈 로트렉,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에드가 드가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모델이었던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을 열렬히 사랑했다.

몽마르트르에 있던 술집 ‘검은 고양이’에서 피아니스트로 일하던 사티는 어느 날 자신의 연주에 맞춰 춤을 추던 로트렉과 수잔을 ‘우연히’ 마주하였다. 수잔은 로트렉의 등 너머로 피아노를 치던 젊은 청년 사티에게 자꾸 눈이 갔고, 사티의 두 눈도 이내 건반보다 수잔을 향했다. 뜨거운 눈빛은 불같은 사랑으로 번져 두 사람은 함께 살기 시작했다.

수잔 발라동, <에릭 사티의 초상>, 1893, 캔버스에 유채, 41.0x21.0cm,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화석이 된 초상화

모델이면서 화가이기도 했던 수잔은 연인인 사티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며 사랑을 키워나갔다. 초상화 속 사티는 (예술가의 고집인지 개성인지) 항상 검은 벨벳 옷만 입었던 그대로의 모습이다. 감정 기복이 심했던 걸까? 붉고 푸르뎅뎅한  음악가의 얼굴은 다소 기괴스럽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영글어있다. 

사티도 수잔의 모습을 오선지에 담았다. 사랑에 빠진 젊은 작곡가에게 연인은 한 편의 ‘마스터피스’였다. 펜으로 무심하게 그린 듯하나 머리카락과 옷을  사선으로 촘촘하게 채워놓았다. 꼼꼼하게 채워진 선은 사랑으로 충만한 설렘이 담겨있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다.

어느 날, 우연히 거울에 비친 수잔의 모습을 본 사티는 소스라치게 놀란다. 거울 속의 수잔이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떠난 어머니의 모습과 희미하게 겹쳤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사티는 그녀와의 잠자리를 피한다. 자신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고 오해한 수잔도 그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격렬하게 싸웠다. 상심한 수잔은 보란 듯이 자살을 시도하고, 그의 곁을 떠났다. 함께 지낸 지 6개월 만이었다.

남겨진 사티는 그녀를 그리워하며, 평생 자신의 거처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사티가 죽은 후, 유품을 정리한 친구들은 30년 가까이 부치지 못한 편지더미와 서로를 그려주었던 초상화를 발견한다. 한때는 죽도록 사랑했던 두 사람.... 남은 초상화에는 허무하게 식어버린 ‘고까짓 사랑’이 화석처럼 굳어 있다.

지나고 보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나를 덮쳤던 슬픔이나 분노가 그저  ‘고까짓 것’이 되어버리듯이….


에릭 사티, <수잔 발라동의 초상>, 1893, 오선지에 잉크,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함께 듣는 곡>


Je Te Veux 당신을 원해 - Erik Satie 

   

사랑에 빠져 두둥실 투스텝을 밟고 있는 듯한 곡.

사티는 이 곡을 듣는 이에게 사랑의 달콤한 비밀을 속삭이고 있습니다.

구름 속에 떠있는 듯 설렘 가득한 사티와 수잔은 그 시절 ‘그 후로도 계속 행복했답니다.’라는 동화의 마지막 이야기처럼 행복에 겨웠을 것입니다.


https://youtu.be/wbT9DeULzU4?si=jtBjwcGlZVeihi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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