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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이랑 Aug 02. 2021

열정과 냉정 사이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그 무언가

 기억하지 못하던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다. 주일 학교 교사를 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배고프면 밥을 먹는 것처럼 자연스레 일요일이면 교회를 다녔다. 할머니와 둘이 있던 시간이 길었던 나는 교회를 가는 일요일을 소풍 가는 것처럼 기다렸다. 아버지가 출근을 해야 해서 교회에 데려다줄 수 없을 때에는 울기도 했었다.


 7살 즈음 서울에서 시골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 아버지께서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다. 어린 나의 손을 붙잡고 시내의 큰 교회에도 갔었지만 거리가 멀었고 아버지의 마음도 멀어졌다. 나 혼자 동네 교회를 다녔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도 하고 찬양도 부르고 율동도 하고 심지어 연극도 했다. 일련의 과정들이 재미있었고 나에겐 다양한 경험들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즈음 성탄절 연극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현대극이었는데 아버지의 곁을 떠나 방황을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와서 양계장을 차리고 성실한 삶을 사는 역할이었다. 대사도 많았지만 독백도 많아서 힘들었다. 특히 날계란을 치아로 톡톡 쳐서 깨고 먹은 후 대사를 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사람들 앞이라 당황을 했는지 잘 깨지지 않아서 세게 치는 바람에 계란이 깨지고 말았다. 당황스러웠지만 독백 부분이라 제스처를 이용해 닦아내며 연극을 끝냈다. 연극에서는 주인공이었지만 조연을 맡은 친구들의 가족이 온 것을 보며 괴리감을 느꼈다. 삶의 주인공은 아니고 주변인인 느낌이었다.


 사춘기가 오는지 혼자 있으면 우울할 때가 많았다. 친구들과 있으면 더 밝은 척 장난을 쳤고 혼자 있을 때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도 하고 사후의 나는 어떨지 생각을 했다. 교회를 오래 다녔지만 신앙심이 깊다기보다는 오랜 습관이었던 것 같다. 스스로도 도마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다. 도마는 12명의 제자 중 하나였지만 예수가 부활했다는 성도들의 간증에도 믿지 않았다. 결국 예수가 그의 앞에 나타났을 때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넣어보고 믿었다고 한다. 성서 완독도 몇 번이나 했고 설교도 열심히 들어서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믿음이 크진 않았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학, 교회에서 기타를 배우게 되었다. 찬양 연주가 능숙하게 되었고 예배 시간에는 자연스레 찬양 인도를 하게 되었다. 평일에도 교회를 가서 연습을 했다. 고등학교 진학을 했을 때 동아리 중 기독교 중창단이 있어 가입을 했고 평일 점심, 저녁 시간을 낼 수 있을 때면 모여서 찬양 연습을 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이 좋았다. 그중 K군을 정말 좋아했다. 집에서도 K군 이야기를 했었고 그 친구는 정말 공부도 잘하고 농구도 잘하고 찬양도 잘했다. 친구였지만 동경의 대상이었다. K군이 신학대학교에 진학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도 신학대학에 진학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집에서는 반대를 했다. 무언가에  빠져서 열정적인 것은 알겠지만  때일 거라고 했다. 그리고 머리로만 알기 때문에 사이비가  거라고 말씀하셨다. 가족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나에 대해  알았다는 생각이 든다. 가족의 반대를 무릅쓸 만큼 열정적이진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 되며 수험을 준비하기 위해 교회 활동을 줄였다. 그리고 수능이 끝나고 시험 성적을 받고  후회를 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평소만큼만 했어도 좋았을 거라며 아쉬워했고 재수를 하는 것을 추천하셨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을 알기에 신앙생활하는 것을 허락했었는데 말렸어야 했다며 미안해하셨다.


 사실 교회활동을 하지 않았어도 나는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돌이켜 보면 공부하는 법을 몰랐었다. 알량한 머리를 믿고 벼락치기로 암기하고 있었으니 기초가 튼튼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고 겸허히 받아들였다.  원하는 대학교에는 가지 못했지만 성적에 맞춰서 대학을 갔다. 등록금 및 생활비를 마련하기 위해 평일 저녁 및 주말에는 알바를 했다. 교회를 갈 시간이 없었다. 어쩌면 핑계일지 모른다. 새벽 예배를 가는 방법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20살 이후 아르바이트를 계속했고 군대도 의경으로 가서 주말에 종교활동을 할 수 없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비스업에 근무를 하게 되어 주말에도 일을 했다. 어느샌가 교회를 다니지 않게 되었다. 물론 이직 준비를 하며 잠시 열정적이었던 그때를 떠올리며 열심히 다닌 적도 있었다. 관성의 법칙이라도 있는지 다시 다니지 않게 되었다.  


 교회에 가지 못해 울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는 그리 간절하지 못한가 보다. 전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민망할 때가 많다. 누군가의 믿음에 대해서 존중하지만 나에게 권유하는 것은 싫고 나 또한 권유하지 않는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그 무언가가 내 속에 자리 잡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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