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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이랑 Aug 01. 2021

난 왼손잡이야

어머니와의 만남

 “난 왼손잡이야.”라는 노래 가사가 있을 정도로 어렸을 적에 왼손잡이는 흔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돌봄 아래 크며 숟가락, 포크를 사용했었다. 7살이었지만 젓가락질은 서툴렀고 불편할 때는 손으로 먹기도 했다. 누군가와 어우러져 식사를 하는 일이 드물었고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

 

 그런 삶에 변화가 생겼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누군가를 데려왔다. 이웃으로 종종 인사하던 아줌마라 낯설진 않았다. 다만 놀러 왔는데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같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했다.


 이웃이었을 때는 한없이 좋은 사람이었지만 우리 집으로 온 뒤로는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잠을 자는 시간이 갑자기 정해졌고 아버지께서 출근하기 전에 일어나서 함께 식사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밤에 보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볼 수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밥을 먹는 시간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시간이 되었다. 포크를 쓸 수 없었고 다른 손을 쓰지 않으면 밥을 먹을 수 없었다. 오른손으로 밥을 먹는 것이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젓가락을 던지고 손으로 먹다가 맞기도 했다. 맞은 만큼 울고 악을 썼고 할머니는 걱정이 되어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아줌마를 나무랐다.


 쪼르르 할머니께 안겨서 아줌마를 흘겨보았다. 이후로도 거실에서 밥을 먹다가 불리한 일이 생기면 울며 악을 써대며 할머니를 부르거나 나오시기 힘들어하는 할머니께 달려갔다.


 오른손으로 수저를 사용하는 것도 불편했지만 소시지나 계란, 김이 없으면 밥을 안 먹던 나에게 김치나 멸치볶음 등은 생소한 반찬이었다. 그런 반찬을 억지로 먹게 했고 나는 반항을 하며 안 먹으려고 애를 썼다.


 아침은 어쩔 수 없이 먹었지만 점심은 놀다가 들어가지 않았다. 저녁도 배가 안 고프다며 버티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 날 너무 배고파서 8시 넘어서 라면을 끓여달라고 했다. 아줌마도 화가 잔뜩 났는지 라면을 5개나 끓여주시고 다 안 먹으면 가만 안 둔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오기로 라면을 5개 다 먹었지만 결국 다 토하고 말았다.

아줌마는 다 치우라고 했고 치우다가 다시 토했다. 우리의 끝이 없을 줄 알았던 전쟁은 동생이 생기며 휴전을 하게 되었다. 그중에도 나는 오른손으로 젓가락 연습을 하며

블록을 집거나 콩을 집었다.


 점심 저녁 건너뛰기 일쑤인데 활동량은 적지 않았던 나는 점점 말랐다. 동네에서 몇몇이 모여 내 이야기를 했다. 아줌마가 집에 들어간 이후 애가 점점 마른다며 계모라서 애를 굶기나 보다고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왠지 내가 이겼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고 더 나쁘게 이야기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말썽을 부리면 아줌마가 가서 사과한다는 걸 깨닫고  동네 가게 물건에 손도 대고 우물에 연탄도 뿌리고 남의 집 논에 미꾸라지나 개구리를 잡는다는 핑계로 들어가기도 했다. 말썽에 참다못한 아줌마는 나를 집 밖으로 내쫓았다. 어차피 아버지만 오시면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아버지의 퇴근 시간만 기다렸다. 그리고 그날은 아버지와 아줌마가 크게 싸웠다.


 결국 내가 이길 거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아침이면 아버지는 출근했고 나도 한시라도 집을 벗어나서 저녁 늦게 들어왔다. 사실 밖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내 또래의 친구도 몇몇 없었고 동네 어른들은 말썽꾸러기인 나랑 어울리는 것을 싫어했다.


 학교는 등교하는데 20분 정도 걸렸고 몇 번 지각을 하고 선생님께 혼이 났다. 어린 마음에 지각하면 혼나기 싫어서 산에 올라가서 놀다가 하교 시간에 맞춰서 집에 갔다. 하지만 아줌마도 내가 학교에 안 간 것을 알았고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버지께도 혼이 났고 다음날 아버지는 학교 앞에 내려주고 갔다.


 학교에서 여자애들 머리를 잡아당기거나 치마를 들추고 고무줄을 끊고 도망을 갔다. 선생님도 말썽을 참다못해

어머니를 모시고 오라고 소리쳤다.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고 한다. “엄마 없는데요. 어느 엄마요? 새엄마라도 오라고 할까요?” 교실에는 정적이 흘렀고 선생님도 당황하셨는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았다.


 학교 생활도 순탄치 않아서 받아쓰기는 0점이었다. 학교는 놀러 가는 수준이었다. 새엄마는 노는 것도 못하게 하고

옆에서 책을 읽게 하고 받아쓰기 시험을 보았다.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나는 불행했다. 신데렐라, 콩쥐팥쥐 등에 나오는 계모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데렐라였고 콩쥐였다. 하지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는 언제 맞이할지 기약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 버틸 뿐이었다.


 나의 반항은 할머니가 돌아가시며 종지부를 찍었다.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지며 항복을 했다. 동생이 태어나며 새엄마라고 부르던 나는 “새”를 놓아주었다.


“새”가 날아가고 호박이 마차로 변하듯 여러 가지가 바뀌었다. 왼손잡이에서 오른손잡이로 변화하던 시기였다. 학교에선 말썽꾸러기는 사라졌고 책벌레”가 남았고 집에선 “큰 아들”이 되었다.


만남은 변화를 가져온다. 변화가 일순간 되지 않아도 진심을 다하면 결국 그 마음이 전해진다. 살면서 많은 만남 중에 어머니를 만난 것은 내게 처음 주어진 변화의 기회였다.


 “많이 원망하고 미워했지만 놓지 않고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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