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과 사는 남자>를 보고
아직 안 보신 분들은 스포가 일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역사물을 좋아하지만, 단종 이야기는 어렸을 때부터 많이 보았기 때문에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이야기로 주로 수양대군이나 한명회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료도 많고 흥미진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패자인 단종이라니 뻔하겠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왕이 되어 권신 김종서에게 휘둘리다가, 숙부인 수양대군에 의해 왕위를 찬탈당했습니다. 단종하면 단골메뉴인 한명회의 살생부라든가 사육신의 충절과 같은 이야기는 과감히 건너뛰고 시작합니다.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사육신의 충절은 단종의 마음을 꺾어버립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생기를 잃은 패자의 모습이 느껴졌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하고, 악몽으로 심신이 약해진 상태에서 음식조차 먹지 않습니다.
몸도 마음도 약해질 대로 약해진 단종은 결국 유배를 가게 됩니다. 해학의 미는 영월의 지지리도 가난한 마을의 촌장 엄홍도가 노루골에서 귀양온 양반 덕에 마을이 흥한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의 마을로 유배를 오도록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누가 올지도 모르면서 유배 온 양반을 잘 모시다가 양반이 잘되어 한양으로 복귀하면 마을에도 복이 올 것이라고 믿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했습니다.
엄홍도의 갖은 노력 끝에 유배지로 성사시킵니다. 이제 마을 사람들도 쌀밥도 먹고, 아들도 양반에게 글공부를 배울 수 있을 거라며 희망에 부풉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수염이 길게 자란 양반은 안 오고, 왠 어려 보이는 양반이 옵니다.
단종의 가마가 뗏목으로 강을 건너던 중 사고로 물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너무 안타깝고, 일국의 왕이었던 사람이 어찌하여 저런 일을 당한단 말인가 하고 속상하기까지 했습니다.
노산군은 모든 희망을 버리고 죽고자 하는데, 엄홍도가 우연히 발견하게 되고 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을이 잘되길 바라는 마음에 유배지로 자청했는데, 노산군이 죽게 되면, 마을에 재앙이 올 거라며 원망하게 됩니다. 재앙 덩어리가 왔다며 노심초사하던 엄홍도는 노산군이 사라진 것을 보고, 또 자살하러 갔다고 생각해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찾으러 갑니다.
산 중에 호랑이를 만나 꼼짝없이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던 마을 사람들을 노산군이 화살로 호랑이의 이마를 명중하며 구하게 됩니다. 복덩어리가 재앙이 되었다가 다시 생명의 은인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열고 노산군에게 다가갑니다. 노산군도 마음을 열게 됩니다.
여리고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다고 알고 있던 노산군(단종)이 마을 사람들의 정을 느끼게 되고, 변화되는 모습은 감동적이었습니다. 마음을 열고, 동네 사람들들과 교류하며 행복한 모습을 보고 여기에서 영화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 중에는 대화를 잘 안 하는데 아내에게 귓속말로 “영화가 지금 끝나도 좋겠다.”라고 속삭였습니다. 결말을 알고 있기에 얼마나 슬프게 하려고 이렇게 행복한 모습을 보여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마치 롤러 코스터가 떨어지기 전에 높이 치솟아 오르는 것처럼 슬퍼질 것 아는 이야기가 점점 행복해져 갑니다.
결국 노산군을 복권시키고자 했던 금성대군의 난은 한명회에게 저지당했습니다. 그리고 노산군도 그 여파를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정성을 다한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촌장인 엄홍도에게 저들의 사약에 죽지 않고, 자신이 죽는 걸 도와달라고 하고, 끈으로 목을 조르게 해서 죽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주로 사약을 먹고, 죽는 것으로 표현되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연려실기술에서는 교살을 당했다고 적혀있습니다. 노산군이 죽는 것을 자신의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죽는 것으로 표현한 모습에 너무 슬펐습니다. 엄홍도는 단지 마을 사람들의 배를 불리려고 유배지로 선정되기 위해 노력했었는데, 노산군을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의 삶과 죽음을 함께 하고, 목숨을 걸고 시신을 수습하는 모습은 충의공이라고 추서 되기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사에 상상이 가미된 내용이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저는 엄홍도였습니다. 엄홍도에 감정이 이입되어 보았습니다. 나였다면 저렇게 할 수 있었을까? 동네 사람들도 살리고, 아들도 살려야 하는데 잘못하면 내 삶이 망가질 수 있는데 저런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역사적 위인이라기보다는 세상을 살아가는 주위에 있을법한 사람 중 한 명이기에 더 몰입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p.s. 그동안 단종하면 정태우 배우였는데, 이제는 박지훈 배우가 기억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