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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드레 Aug 04. 2021

문어를 통해 생각한, 삶의 종교적 의미

[생각이 많아지면, 글을 씁니다] 넷플릭스 '나의 문어선생님'을 보고

  다큐멘터리의 제목부터가 특이했다, 나의 문어 '선생님'이라니. 사전적 의미를 고려할 때, 여기서 말하는 선생님이 '나이가 어지간히 든 사람을 대접하여 이르는 말'을 일컫는 것은 아닐테고, 분명 '학생에게 가르침을 주는 사람'을 뜻하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한낱 연체동물에 불과한 문어가, 고등 동물의 정점인 사람에게 어떠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인지, 제목만 보고서는 선뜻 이해하기 힘들었다. 게다가 선생을 편하게 부르는 '쌤'도 아닌, 어쩌면 선생에 대한 존경의 의미까지 담겼다 생각할 수 있는 존칭의 단어 '선생님'이라니. 결국 나는 영상의 흥미로운 제목에 낚인 것이고, 감독은 대체 어떠한 의도를 갖고 이를 제작했는지 반신반의하며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을 시청하게 되었다.




  영상의 제작자는 세파에 시달리다 결국 번아웃 되었고, 지친 현실로부터의 휴식과 극복을 위해 대서양으로 도망치듯 떠나 온 사람이었다. 그 역시 갈수록 가중되는 업무와 팍팍한 현생에 치여 지쳐가는 우리와 다를 바 없었기에, 제작자의 관점에 보다 몰입하게 되는 느낌이 있다. 그는 매일마다 바다로 나가 스노클링을 하며 수중 생태계를 탐사한다. 날마다 계속되는 바다 탐사... 여기서 이 다큐멘터리의 영상미는 빛을 발한다. 거대한 해조류 군락에서 제각각 치열하게 살아가는 각종 해양 생명체들의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수중 생태계의 경이로움이 절로 느껴진다. 또한 이를 가만히 관찰하며 영상에 담아내는 제작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현실의 숱한 고민들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이 다큐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현실에서 찾기 힘든 시각적 힐링을 선사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도 분명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수중 탐사를 이어가던 도중, 그는 기이한 형태의 뭔가를 보게 된다. 온갖 조개껍데기와 돌 따위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무엇, 그것은 바로 문어였다. 그 기이하고도 신비로운 첫 만남이, 제작자가 바다, 특히 문어에 더욱 빠져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온갖 조개껍데기들로 자신을 위장하고 있는 문어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제작자의 연출인지 아니면 자연에서의 진실된 조우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스노클링을 통해 거의 매일같이 그 문어와 만난다. 그 문어도 나름 한 인간과의 계속된 만남에 익숙해진 것일까, 경계를 풀고 스스로 다리를 제작자에게 내밀어 '친근감'으로 보이는 행동을 보인다. 이 장면을 보면서는 솔직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문어가 똑똑한 동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낱 식재료 이상의 의미로 여겨본 적은 없었는데, 무려 인간과의 교감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을 보일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한 까닭이다. 역시 단지 글로 아는 것과, 실상의 모습을 목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던 것이다. (문어의 지능은 개나 고양이와 비슷하고, 하급영장류의 지능과도 맞먹는다 한다.) 지금껏 문어를 그리 좋아하지도, 먹거리로 즐겨 찾던 것도 아니었지만, 이 영상을 보고 나니 '이제 내가 문어를 거리낌 없이 입에 댈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스쳐지나갔다. 아마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상을 보고 비슷한 느낌을 받으리라 본다.


제작자에게 문어가 드러내는 교감의 표시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제작자의 카메라를 통해, 문어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준다. 물살에 힘없이 움직이는 다시마 같은 해조류의 모습을 몸짓으로 흉내내 위장하면서 포식자의 눈을 피하기도 하고, 사냥하기 힘든 먹이의 습성을 파악하여 그에 맞춰 사냥 방식을 변칙적으로 적용하기도 한다. 또한 해당 지역의 포식자인 '파자마 상어'로부터 피하기 위해 자신의 특성을 발휘하여 뭍의 갯바위로 잠시 도망치거나, 포식자의 사각지대인 상어의 등에 올라타 갑을관계를 전환시키는 묘수를 부리기도 한다. 이 모두는 치열한 먹이사슬의 세계에 적응한 문어의 지혜의 소산일 터. 우리가 치열하게 사회를 살아가는 것과, 이 문어의 모습이 뭐 그리 큰 차이가 있을까. 인간인 제작자가 현실의 도피처로 삼은 바다였지만, 결국 수중 생태계 역시 우리네 사회와 별반 다르지 않은 치열한 생존의 장이었을 뿐이다. 특히 파자마 상어에게 한 쪽 다리를 뜯기는 치명상을 입고서 바위에 몸을 숨기고 회복기를 거치는 문어의 모습은, 번아웃을 겪고 이곳 대서양 바다에 틀어박혀 지내는 주인공의 모습과 묘하게 오버랩 되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뜬금없지만, 문어를 일종의 '제작자 관찰자 시점'으로 바라보는 주인공을 통해 바닷 속 '인간'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문득 (만약 존재한다면)'신'의 존재에 대한 사유로까지 생각이 번졌다. 팍팍한 현실의 세계와는 달리 너무도 이질적이며 아름다운 영상이, 나를 비현실적인 생각으로까지 인도한 게 틀림없다. 해당 지역 바닷속에서의 주인공과 같은 인간은, 어찌 보면 일종의 '초월자'로 보인다. 그는 지역 내 최고 포식자인 파자마 상어들을 쉽게 쫓을 수도 있고, 약한 해양 생물들을 구해낼 수도 있는, 가장 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자연 생태계를 대함에 있어 '개입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관조하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하는데, 이는 인간의 얕은 식견으로 자연에 대해 인위적 영향력을 행사했다가, 생태계 전체의 조화가 어긋나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까닭이다. 영상의 주인공 역시 이 행동 준칙 내에서 문어와 만난다. 그렇기에 문어가 파자마 상어에게 다리 하나를 잃었을 당시에만 예외적으로 조금의 먹이를 공급해 줬을 뿐, 이후 파자마 상어에게 문어가 잡아먹힐 수도 있었던 급박한 순간에서도, 문어가 새끼들을 위한 본인의 소임을 다 한 후 죽음을 맞기 직전에서도 주인공은 수중 생태계에 개입하지 않는다. 그 역시 개입하지 않는 관조야말로 자연 생태계를 지키는 방법이라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관조의 자세야말로, 어쩌면 모든 것의 섭리가 아닐까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그렇다면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믿고 있는 누군가의 '신' 역시, 세상을 가만히 두고 개입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인간을 위한 일종의 섭리라 생각하여, 관조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유아 세례를 받은 때 부터 가톨릭 신자의 한명으로서, 그간 신의 정의로움이란 무엇인지, 과연 하느님은 선하신 분인지, 능력이 있으시기에 그냥 인간을 만드셨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신지, 하느님은 인간을 사랑하시긴 하시는지... 등의 불경한 물음을 수 없이 던져왔다. 사색을 통한 답을 구하려 시도하였으나, 늘 그랬듯이 항상 답은 구하지 못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접한 자연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에 대한 생각을 어느정도 정립하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신이 선하고, 스스로 창조한 세상을 사랑한다 가정한다면, 신은 그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옳은 것이 아닐는지. 그렇다면 신은 그저 세상을 관조할 뿐일 것이다, 마치 바닷속 문어를 바라보는 주인공처럼.



  우리는 주위의 사건들이나 뉴스 등을 통해, '저 착한 사람이 왜 저런 불미스런 일을 당하고, 저런 나쁜 사람은 대체 왜 저렇게 잘 사는지'를 생각하며, 세상의 불합리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당연히 합당하지 못하다 여기는 것들에 대해 분노할 수 있지만, '신은 대체 무엇을 하기에 세상이 이 꼴이냐'는 등의 말은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신은 아마도 이것이 옳다 여기고, 그저 세상을 관조하고 있을 뿐일테니. 종교학적, 신학적 지식이 미천하여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이제야 깨달아 적는 글일수도, 혹은 여전히 이치를 깨우치지 못하고 헛소리를 늘어놓는 글일수도 있다. 뭐 어떡하랴, 나의 문어 선생님이 내게는 이런 가르침을 주신 것을.




  갈수록 가중되는 일에 치여 피곤한 하루를 마친 후, 영상을 통해 마주한 대서양 바닷속의 문어를 바라보며, 종교적 영역에까지 생각이 미칠 줄은 몰랐다. 문어의 고등함에 놀란 영상임은 분명했으나 단지 문어 자체라기보다는, 인간과 문어, 그리고 다양한 바다 생물들이 어우러진 해양 생태계 그 자체에서 어떠한 배움을 얻은 것만 같다. 영상의 제작자 역시 문어를 통해 자연, 그리고 문어가 속한 바다 전체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를 보전하기 위해 활동가의 삶을 선택하였다는데, 그것이 제작자가 문어 선생님으로부터 배운 삶의 가치일 터이다. 물론 나 또한 문어 선생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이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고, 나를 힘겹게 하는 하나 하나에 분노하며 귀한 삶을 좀먹기 보다는, 문어와 같이 그저 지금의 세상을 치열하게 살되 가끔씩은 순리에 맡기기도 하라는... 뭐 그런 가르침.


해양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한 활동가의 삶을 택한 제작자, 나의 배움은 나를 어디로 인도할지.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영상을 보고나서야 그 제목이 비로소 이해되는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선생님.

다른 사람들은 이 다큐멘터리를 통해, 문어 선생님으로부터 어떠한 가르침을 받게 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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