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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드레 Jul 06. 2021

다들 비 오는 날을 좋아하시나요?

[생각이 많아지면, 글을 씁니다] 비 오는 날

  어느 여름날 즈음이었을 것이다. 어렸던 나는 거실 마루에 앉아 나무 블럭들을 이리저리 쌓아 올리며 탑이나 집 따위의 구조물을 만들거나, 일렬로 블럭들을 세우며 도미노 놀이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문득 유리창 밖의 콘크리트 마당을 보았고, 빗물로 고인 작은 웅덩이들로 빗방울들이 떨어지며 각각의 파장을 그려내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열어둔 창문의 방충망 사이로 흙내음이 담긴 선선한 바람이 조용히 불어왔고, 탈탈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와 서석거리며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들의 뒤엉킴은 홀로 있던 거실의 고요함을 살포시 채워주었다. 그저 맑고 고요했던 날이 '비' 하나로 인해 이렇게 뭔가 동적으로 변하는 것이 마냥 신기했었고, 가만히 밖을 바라보는 것이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떠오르는 비에 대한 첫 기억이다.


유년기를 함께 한 조부모님 댁. 비오는 날, 저 콘크리트 마당을 바라보았을 터이다.


  그 당시의 비에 대한 느낌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워낙 어릴 적이었을 때이니, 정확히 알 수는 없겠지만, 호감에 가까운 감정이었지 싶다. 동네 친구들과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놀지 못하는 것은 분명 아쉬운 일이었으나, 가만히 있음에도 그다지 지루하지 않았던 날들은 대개 비가 오는 날들이었다. 지금에야 그러한 감정들을 '운치를 즐긴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때는 창 밖으로 펼쳐진 비 오는 날의 낯선 풍경들이 그저 신기했었나 보다. 비오는 날이면 마당으로 모습을 보이던 청개구리와 지렁이, 그리고 비가 그칠 즈음해서 나타나던 달팽이들 뿐이랴. 거실 창 밖 좁은 콘크리트 마당 뒤로 커다란 목련나무와 왕벚나무, 그리고 은행나무들이 심어진 정원을 보며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분명 소도시 산동네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치이자 운치였다. 어쩌면 비 오는 날은, 익숙했던 풍경의 색과 소리, 그리고 바람이 변하는 것을 조용히 보며 즐길 수 있는 특별한 날이었던 것이다.




  어느 덧 시간은 흘러 30대로 접어든 지금, 여전히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고 있을까. 그 간 비 오는 날이 분명 싫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물음에 대한 답이 한 번에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비 오는 날을 싫어하고 귀찮아 하는 감정이 조금은 더 큰가 보다. 어릴 적의 비오는 날이란 비로 변하는 풍경들을 근심 없이 감상할 수 있는 날들이었지만, 지금의 비 오는 날은 바쁜 일상을 더욱 힘들고 지치게 만드는 악재이자 변수따위로 생각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출근길이 없는 휴일의 비 오는 날은, 여유로운 하루의 운치를 더하는 날인 경우가 더 많기는 하다. 힘든 일상에서는 귀찮아하고, 느긋한 하루에서는 반가워하는 이런 간사함이라니. 비는 죄가 없는데 말이다.



  비를 일상의 변수로 생각하기 시작한 때부터였을까, 내 가방 한 켠에는 오래도록 작은 검은색 접이식 우산 하나가 들어있었다. 갑자기 비가 오면 그냥 근처 편의점에서 우산을 하나 사서 쓸 법도 한데, 그런 돈도 아까웠던 것인지 우산 하나는 내 가방을 떠날 줄을 몰랐다. 많은 것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고 제어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 날씨 변덕 하나쯤엔 그래도 대비하고 싶었던 까닭이었을까. 하지만 올해부터는 더 이상 우산을 가방에 항상 넣어 다니진 않는다. 그 우산을 빼서 현관 우산 보관함에 집어 넣었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나는 것을 보면, 뭔가 생각을 하면서 우산을 빼긴 했나 보다. 사실 작은 우산이라 해도, 다른 짐과 더해지다 보면, 가방에서 그 무게가 결코 가볍지는 않다. 작은 우산의 무게마저 귀찮고 부담스러운 것이 되어 우산을 가방에서 뺀 것일까. 아니면 이젠 급작스런 비와 같은 일상의 가벼운 변덕 정도는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겨 우산을 뺀 것일까. 우산을 빼 낼 때의 내 생각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지는 지금이다.





  비 내리는 오늘의 퇴근길, 각자의 아늑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고 버스를 기다리며 일렬로 줄 지어있고, 형형색색의 우산들이 길거리를 다채롭게 꾸민다. 2층 까페에 앉아 비 오는 날 어울리는 음악을 들으며 느긋하게 창 밖 퇴근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앉아있는 나는, 어릴 적 비 내리던 창 밖 풍경을 바라보던 그 때의 나와 닮아있을까. 소쇄한 정원에서 빌딩 숲으로, 빗물 고인 웅덩이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리던 마당에서 경적 소리 가득한 대로로, 창 밖의 공간은 변했지만, 나는 여전히 비오는 창 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창 밖을 바라보며 나는 어릴 때 마냥 운치라는 것을 느껴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당장은 여유로운 자신에 안도하며, 비 오는 퇴근길에 펼쳐진 많은 우산들을 상대적 우월감을 갖고 관찰하고 있는 것인지. 앞으로 비 내리는 날이면 간사한 내 감정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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