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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드레 Jan 01. 2022

익숙한 시대 속, 낯설고도 서글픈 '백성'들의 생존기

[책을 읽고, 생각을 잇고] 김영하의 <검은 꽃>

  일제 강점기. 한일 병합조약으로 인해 대한제국이 멸망한 경술국치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5일 광복에 이르기까지 35년 간 한반도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던 기간을 일컫는 시기. 그 잔혹한 시기의 잔상은 지금껏 남아 정치적, 문화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식민지배 기간에 대한 일본의 사죄 문제 등 현재 진행형인 문제들이 산적해 있음은 물론, 정규 교육과정을 통해 이미 우리는 그 시대적 아픔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고, 숱한 고난과 수난의 역사를 지식으로 알고 있기도 하다. 나아가 문학, 영화, 드라마 등 숱한 문화적 매체들을 통해서도 일제 강점기는, 어쩌면 '컨텐츠'적 측면에서까지 충분히 사용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경술국치, 그리고 경복궁 근정전 (사진 출처 : 우리역사넷)

  하지만 만주 및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부터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의 국내진공작전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및 태평양을 둘러싼 국제정세 속에서의 한민족의 독립운동을 다룬 거시적 역사를 아는 이는 많지만, 격동의 시대 속 저항조차 제대로 못한 채 스러져 간 이역만리 타국의 민초들을 위한 미시적 역사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교과서 속에서도 미국 하와이 플랜테이션 사탕수수 농장, 그리고 멕시코 애니깽(=용설란, 다육식물의 일종.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특산물로 가시가 많고 독소가 많으며 밧줄과 카펫의 원료로 재배되고 있다.) 농장에서의 조선인 노동자들은 글 한 줄, 사진 한 장 정도로 설명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까.


애니깽 농장의 노동자들 (사진 출처 : EBS1,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애니깽 농장의 노동자들 (사진 출처 : EBS1, 세계견문록 아틀라스)

그나마 하와이 이주민의 역사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배경으로 인해 그나마 잘 기억된 역사로 남아있지만, 제국주의가 서로 격돌하고 세계대전의 광풍까지 휘몰아치던 망국의 세태 속, 당시 잘 알지도 못했을 타국 멕시코에서의 조선인 노동자 1,033명을 신경쓰고 기억해 줄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미처 돌아보지 못한 역사 속 깊게 패인 상처의 한 측면에 대한 부채감으로 작가는 펜을 들었을 터이다.





  우리가 주로 알고 있는 역사가 국제 정치역학 및 위정자의 시선에서 서술되는 '거시사'적 측면의 역사라면, 김영하의 장편소설 <검은 꽃>이 다루는 세계는, 위정자의 시선을 배제하고 오직 멕시코 조선인 노동자들의 시선으로만 서술되는 '미시사'측면의 역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제강점기의 역사를 배우며 간악한 일제의 착취나, 난관 속에서도 행해진 독립운동의 숭고한 역사를 기억하기는 쉽지만 정글도 '마체테'를 들고 뙤양볕 속에서 애니깽을 베어내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떠올리긴 어렵지 않은가. 미시사적 흐름 속에서, 이 소설은 사자 우리에 던져진 양 떼 마냥,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외세로부터 착취당하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냉정하리만큼 가감없이 그려낸다. 그 혼란과 아픔을 그리며 지금의 우리에게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 줌은 물론이고.


  소설 <검은 꽃>이 그려내는, 노예계약과 다를 바 없는 사기극으로 비롯된 조선인 노동자 1,033명의 멕시코로의 이민은 그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황족의 신분을 가진 이들부터 천주교 신부, 무당, 도둑, 그리고 노예에 이르기까지 반상의 구별 없이 모인 조선인 노동자들은 이민선 '일포드 호' 선실 내에서 가축만도 못한 대우를 받으며 여정을 지속한다. 공용 화장실 하나 제대로 구비되지 않은 선내에서, 파도가 칠 때마다 서로 뒤엉키며 서로의 오물을 섞으며 반상의 법도는 사라지고, 모두가 함께 비천해지는 강제적 평등화의 과정을 거친다. 신분계급이 사라지는 국제적 흐름 속에서 평등의 가치가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겠으나, 이민선 속 조선인 노동자들의 모습을 통해 소위 '평등'을 표현해 내는 작가의 방식이 너무나 감정을 배제하고 있기에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첫 멕시코 이민선 '일포드 호' (사진출처 : 연합뉴스)

  많은 것이 변하던 시대였던 만큼, 조선의 구시대적 가치와 당시 제국주의의 이른바 '선진적 가치'가 충돌하는 양상 또한 그려지고 있다. 태평양 건너 먼 이국 멕시코 땅에서 조선의 무당을 통해 행해지는 굿판으로 상징되는 샤머니즘의 발현이 애니깽 농장주들의 원리주의라 할만큼 맹목적인 가톨릭 신앙과 충돌함은 물론, 지배계급인 농장주와 피지배계급인 조선인 노동자들 간 착취적 노동환경에서 비롯된 갈등 역시 다뤄진다. 힘의 논리에서 이러한 갈등들이 조선인 노동자들의 패배로 이어짐은 자연스런 결말이겠으나 강자와 약자 간 대립이라는 진부한 서사와는 달리, 이러한 소재들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다양한(진보적인 때로는 구태의연한)시선들을 통해 오히려 가치관이 변해가던 시대상을 유추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망국 대한제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주체적인 사상과 진일보한 자세를 지녔던 조선인 역시, 세태의 격류 속에서 결국 현실과 타협하고 시대에 무너져 스스로를 내던지는 '한낱 조선인'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며 느끼는 씁쓸함은 덤이고.




  소설 <검은 꽃>을 관통하는 핵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기존의 문학들과 크게 다르지는 않은 듯하다. 터전(국가)을 잃은 민초들은 결국 범람하는 강물 속 나무 파편들처럼 이리저리 휩쓸리다 사라져 갈 뿐이라는 것. 다만 기존의 문학들과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동일한 감정을 공유하는 조선인들이 자리잡은 터전이 고국 조선(대한제국)으로부터 한 달이 넘는 항해가 필요한 머나먼 타지 멕시코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를 강산(江山)이라 부르며 해가 서쪽 산 너머로 지는 광경을 보며 살아온 조선인들이, 뙤양볕이 내리쬐는 메마른 광야에서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멕시코에서 마주한 감상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들에게는 그래도 동북아에 남은 조선인들과는 달리 최소한의 정서적 안식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아무리 조선인들이 멕시코에서 발버둥친들, 그들의 삶은 흘러흘러 멕시코 혁명군의 일원으로까지 흘러온 조선인 '김이정'과, 일본의 탈영병이었지만 멕시코 일본 영사관 직원으로 거듭난 '요시다'의 대화를 통해 정리된다. (이민선 '일포드 호'에서 이 둘은 나름 긴밀한 관계였으나 자세한 사항은 소설을 통해 확인하길 바란다. 아래의 대화 역시 그러한 관계가 있었기에, 요시다가 김이정에게 우호적으로 말했을 것이다.)


요시다가 돌아서는 이정을 잡았다.


 - 요시다 : "참, 이제 너도 일본인이야. 그러니까 너의 행적도 우리로서는 모두 보고사항이야. 알고 있겠지만 멕시코에 사는 모든 한인들은 1910년부터 모두 일본인으로 국적이 바뀌었어. 그러니까 필요한게 있으면, 예를 들어 여권이 필요하다든지, 억울한 일을 당했다든지 하면, 일본 영사관으로 찾아오라고. 재외국민을 보호하는 게 공관의 임무니까."


 - 김이정 :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 요시다 :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거야."


요시다는 이정의 어깨를 툭 치고는 대통령궁(멕시코)으로 걸어들어갔다.





  소설 <검은 꽃>은 어떠한 역사적 교훈을 주입하려 하기 보다는, 감정이 묻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감정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상황을 초연히 관조하는 문체를 유지한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그 역사적 상황들을 차분히 들여다보게 만들고, 독자를 그 세계에 더욱 현실감있게 빠져들게 만드는 듯하다. 본래 존재의 근거조차 상실한 개인들, 즉 일제강점기 하 멕시코 조선인 노동자들의 무력감을 냉정하리만큼 차갑게, 그렇기에 더욱 현실적으로 표현해 낸 작품이다. 평범한 개인들의 관점에서 역사라는 거대한 흐름을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하는 책, 많은 등장인물 중 누군가를 주인공이라 단정하기 어려운 책이었다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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