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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보드레 Jun 14. 2021

시 쓰기, 관찰, 그리고 인생의 숙제

[책을 읽고, 생각을 잇고] '인생의 숙제'_(백원달 저)

  오랜만에 에세이를 읽고 싶어, 밀리의 서재를 한참 동안 뒤적였다. 내 서재에 담아 놓은 책들이라고는 죄다 경제/경영, 사회, 역사와 관련된 책들 뿐인 것을 보고, '아... 수필이나 소설을 읽은 지가 대체 언제였던가'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단 밀리의 서재만이 아니라 집안 책꽃이를 바라봐도, 책의 분야별 편중은 뚜렷해 보였다. 언제부터인가 독서를 어릴적 그리도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마음의 양식'을 쌓는 과정이 아닌, 지식을 자랑하며 나를 좀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일'의 일부로 여기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멀어진 글에 좀 더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밀리의 서재 '힐링'파트를 목록을 살피다, 뭔가에 이끌리듯 제목이 거창해 보이는 이 책을 선택했다.



  제목만 봐서는 중후한 문체와 연륜이 담긴 글감이 가득한 수필집일 줄 알았더니 웬걸, 30대 초반의 관점으로, 따스한 글과 만화가 함께하는 형식으로 담담하게 써 내려 진 책이었다. 처음에는 다른책을 읽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요즘 출간되는 많은 에세이들은 삶과 인생의 무게에 대한 어떠한 '공감'을 추구하기보다는, 인생은 잘 풀릴거라는 근거없는 낙관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짙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한 글의 가벼움이 결국 만화로까지 이어졌구나...'라고 생각하며 다른 책을 고르려던 찰나, 나를 멈춰세운 건 '어린 왕자에게'라는 시로 갈음한 프롤로그였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삶이 아름다운건

내 안에 우물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야


삶을 아름답게 하는 건

보이지 않는 것이야


비록 그 우물이

비어 있을지라도


  순간 어떤 형식이건 간에 '시'를 읽은 것이 대체 언제였나 돌이켜봤다. 시의 첫 단락을 '어린왕자'의 유명 구절을 인용하며 시작한 프롤로그의 시는, 따스한 배경 그림과 함께 나를 잠깐 그 페이지에 머물게 만들었고, 이는 결국 책을 끝까지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에는 작가가 쓴 총 10편의 시가 함께 담겨 있는데, 현학적이거나 전문적이지 않은 일반인의 감성이 잘 녹아 있어, 보다 잘 공감할 수 있는 시들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형식으로라도 시를 다시 읽을 수 있는 책이었음에 새삼 감사하다.



  이 책은 '작가'가 되기를 소망하는 직장인 '박유나'를 주인공으로 하여 그녀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고 있다. 30대 초반의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할 법한 주제들인 일상의 헛헛함, 자신의 꿈, 결혼, 친구, 그리고 주변 사람들 등의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에는 조금 색다른 관점이 담겨있다. 여타 비슷한 류의 책들은 대개 저자 본인의 주관을 책에 보다 담아내려 노력하지만, 이 책에서는 작가를 지향하는 주인공답게 주변을 '관찰'하며, 그로부터 얻어낸 통찰과 깨달음을 스스로의 이야기와 결부시킨다. 저자의 관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책 곳곳에 끼어있는 10편의 자작시들과 이어되는 것을 보며, 비록 만화의 형식을 빌렸지만, 이야기와 시가 매끄럽게 연결되는 책이라 생각했다.



  '나는 일만 하다보니, 내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잊어버렸다'는 고백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앞으로 이어질 결혼과 육아,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는 인생의 여로에서 '자신의 길 위에서 나를 사랑할 것'을 주문하며 비슷한 나이대에서 방황하는 독자의 등을 가만히 토닥여준다. 프롤로그의 시 '어린 왕자에게'는, 그저 도입부의 환기를 위한 시가 아니었음을, 책을 읽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작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그리고 나와 내 삶을 사랑할 수 있는 무언가가 분명히 있음을 묵묵히 말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어린왕자가 어딘가에 숨어 있을 사막의 우물에서, 사막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듯이.



  만화의 형식을 빌린 책이라 하여, 그 의미까지 가볍지는 않음을 이 책을 통해 새삼 오랜만에 다시 느낀 듯하다. 특히 책에 담긴 적당히 풋풋한, 하지만 가볍지만은 않은 열 편의 시를 읽으며, '글(시) 쓰기'가 주는 일종의 치유작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등단을 꿈꾸는 주인공이 글을 통해 점차 성장하고 치유받는 과정이, 책 밖의 나까지 그렇게 느끼게 만든 것은 아닐는지.



  '인생의 숙제'라는 거창한 제목이지만, 결혼이나 자신의 꿈과 같은 제각각의 인생의 숙제를 가장 많이 고민하는 시기가 30대인 것을 생각하면, 적절한 제목이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든다. 그런데 그러한 고민들이 정말로 마감기한이 정해진 '숙제'인 것인지, 사실 데드라인은 없는데 나 혼자 숙제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는 것들인지 아직은 모르겠다. 어린왕자가 어딘가 있을 사막의 우물에서 사막의 아름다움을 생각했듯, 내 삶의 아름다움을 어디선가 또 찾아 볼 일이다. 인생의 숙제라고까지 부담스럽게 생각하진 않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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