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느 때보다도 '자유'라는 단어를 많이 보고 듣는 요즘이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가판대에서도, 유튜브 인기 영상 목록에서도, 그리고 공영 방송에서까지. 눈과 귀가 닿는 많은 매체들에서 '경제적 자유'라는 개념을 이렇게까지 양산해 낸 시기가 있었나 싶다. 낯섦 속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진다 . 경제적 자유를 추구하자는 사람들의 영상이나 글을 볼 때마다 IMF 외환위기의 상흔이 사라질 즈음 한 카드사의 TV 광고 대사가 떠오르는 까닭이다. "여러분,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꼭이요!!" 어려웠던 당시 덕담으로 자주 사용되었던 '여러분 모두 부자되세요'라는 말과, 지금의 '경제적 자유를 추구합시다'라는 말은, 과연 그 실질이 다른 것일까. 어쩌면 외면적 살림살이는 당시보다는 많이 좋아졌겠지만, 개개인의 마음의 곳간은 그 매서웠던 시기와 다르지 않은지도 모른다. 이젠 오랜 기간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온, 돈으로부터 비롯된 근심과 걱정까지 해소하자는 염원으로 '경제적 자유'라는 말이 유행하는 것은 아닐는지. 그 말인즉슨, 우리는 아직까지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뜻일 것이다. 물론 경제적 문제만은 아닐 터이고.
*2002년 BC카드의 TV CF광고_(모델 : 배우 김정은)
경제적 측면의 자유만이 많이 회자되는 지금이지만, 다른 측면에서도 우리는 과연 자유로운가 생각해 본다. 국어 사전은 자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우리는 과연 사전적 의미의 자유를 삶에 온전히 녹여내며 살고 있는 것일까. 불행히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렇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며 늘 행복하고 자유롭고자 하지만, 또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잠 못 이루며 불행에 빠지기도 한다. 그 걱정의 원인은 앞서 말한 돈에서 비롯된 경제적 문제일수도, 사회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본인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 때문일수도, 혹은 사랑하는 이와의 감정적 문제 때문일수도 있다. 여러 원인들이 있겠지만 그 뿌리는 결국 '(미래의) 자유를 꿈꾸지만, 현실에 예속된 나는 정녕 자유로운가'에 대한 고민, 이는 누구나 겪는 삶에서의 진통일 것이다. 불행하고 걱정이 있다는 것은, 자기 마음대로 뭔가를 할 수 없다는 것, 즉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고민은 소설 속의 '나(이하 주인공)' 또한 겪고 있었다. 이상과 자유 사이의 순환고리에 빠져 끊임없는 번뇌를 겪고 있던 주인공. 그 고통 속에서의 한 줄기 빛이 되어줄 깨달음을 얻고자, 주인공은 계속해서 부처의 사상을 탐닉했을 것이다. 어쩌면 이는 이상주의를 추구하는 지식인이 겪어야 하는 현실에서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향 크레타로 돌아가 갈탄 사업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던 그 때, 주인공은 '조르바'와 만나게 된다. 현재 이 순간에 충실하라는 'carpe diem'의 화신인 듯한 조르바는 주인공과는 정반대 성향의 소유자로서, 자유와 본능에 충실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인다.
- 조르바 : "분명히 해둡시다.
나한테 윽박지르면 그 때는 끝장이에요.
결국 당신은 내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해야 한다 이겁니다."
- 주인공 : "인간이라니, 무슨 뜻이지요?"
- 조르바 : "자유라는 거지!"
* 영화 `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 , Alexis Zorbas , 1964) 중 한 장면
이 대화에서 조르바는 '인간은 곧 자유로운 존재'라 말한다. 이상론을 추구하며 현실적 고뇌를 겪는 주인공과는 너무도 다른 인간상이 아닌가. 나는 주인공과 대비되는 조르바의 모습을 보며, 작가 카잔차키스의 이 소설은 실존인물 조르바의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작가 스스로의 자유롭고자 하는 다른 자아를 조르바에 투영시켜 그려 낸 이야기일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사람들은 대개 두 개의 자아를 지니고 있다. 하나는 보이지 않는 미래와 이상을 추구하며 현실의 나를 계속하여 채찍질하며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자아요, 다른 하나는 현실의 행복에 만족하며, 너무 자신을 다그치지 말라며 현실을 위로해 주는 자아이다. 후자는 '자기 합리화'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 당하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이는 현실의 자유를 만끽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도 않을까. 누군가에게는 간절할 자유를 있는 그대로 즐기며 살아가는 조르바의 모습은 현실 속 나의 모습을, 그리고 내 자아들은 과연 자유로운지 돌아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조르바가 말하는 자유란 대체 어떤 의미일까. 작가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은 그 의미를 대략 짐작케 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생의 마지막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말은 곧 자신의 삶에 있어 아무런 후회를 남기지 않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자유로움과 후회 없는 삶이라는 것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이었던가? '자유'라는 말만 놓고 보면, 조르바가 주인공과는 달리 방탕하고 본능에만 이끌려 살아가는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실제 그런 면모가 많기는 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렇지 않다. 조르바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강한 사람이었고, '할 때는 끝장까지 가 보는' 삶의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삶에서 어떤 것에 대한 '갈망'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현실에의 완전한 몰두를 통해 삶의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조르바가 자유로운 이유였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들을 아래와 같이 인용하며, 왜 조르바는 어떤 갈망과 후회도 남기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대신한다. 이보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의 원천을 잘 설명할 수 있을까.
".....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이 이야기면 설명이 되겠군. 어렸을 때 말입니다. 나는 버찌에 미쳐 있었어요. 하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돈이 없어서 한꺼번에 많이는 살 수 없고, 조금 사서 먹으면 점점 더 먹고 싶어지고 그러는 거예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버찌 생각만 했지요. 입에 군침이 도는 게, 아, 미치겠습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화가 났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버찌가 날 데리고 논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아시오? 나는 밤중에 일어나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지요. 은화가 한 닢 있습디다. 꼬불쳤지요. 다음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샀어요. 도랑에 숨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올 때까지 처넣었어요. 배가 아파 오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렇습니다, 두목. 나는 몽땅 토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었어요. 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 언제 어디서 버찌를 보건 내겐 할 말이 있습니다. 이제 너하고는 별 볼일이 없구나 하고요. 훗날 담배나 술을 놓고도 이런 짓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마시고 피우지만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 버립니다. 나는 내 정열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일을 어정쩡하게 하면 끝이에요. 말도 대충하고 착한 일도 대충 하는 척만 하고 그러니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되는 겁니다. 할 때는 화끈하게 해야지요. 못 하나 박는 것도 성실하게 해야 임무가 완수되는 거예요. 하느님은 대장 악마보다 어정쩡하게 반만 악마인 것들을 더 미워하시는 거요."
어찌됐건 '이상'을 대변하는 주인공과 '자유'를 상징하는 조르바는 갈탄광을 운영해 나가며, 마을의 대소사들을 함께 경험한다. 이상과 자유가 함께 한다는 것, 이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두 자아의 동행을 의미한다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상에 매몰되지도, 자유에 안주하지도 않는 각 개인의 조화로운 삶. 하지만 이상과 자유를 적절히 조화시키며 살아간다 하더라도, 삶이 쉽지 않음을 책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주인공과 조르바가 갈탄광 채굴사업에서의 목재 수송 효율을 높이고자 야심차게 진행한 케이블 구조물 설치 작업은, 많은 사람들이 자리한 최초 작동을 알리는 행사에서 말 그대로 박살나버린다. 쉽지 않은 인생... 하지만 모두가 자리를 떠난 폐허같은 케이블 구조물 잔해를 뒤로 하고 두 사람이 같이 떠올린 것은 바로 '양고기'였다. 주인공과 조르바가 케이블 잔해를 바라보며 후회하거나 투자비용을 생각하며 좌절하지 않고, 양고기를 먹자고 한 것은 아마 당시 후회를 남기지 않고 케이블 작업에 전념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역시 후회가 없으니 현재의 본능에 충실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소설에서는 주인공과 조르바가 함께 '춤'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소설의 경과에 따라 춤에 대한 주인공의 인식이 바뀌는 과정이 흥미롭다. 내용의 일부분들을 아래와 같이 인용한다.
[소설 초반부]
- 조르바 : "춤추시겠소? 춤춥시다!"
그가 내게 졸랐다.
- 주인공 : "싫습니다."
- 조르바 : "싫다고요?" 그는 어리둥절해진 채
두 팔을 양 옆으로 툭 떨구어 대롱거리게 했다.
- 조르바 : "좋습니다." 잠시 후에 그가 말했다.
"그럼 나 혼자 추겠소, 두목.
멀치감치 떨어져 앉으시오.
받아버리지 않게 말이오."
[소설 후반부]
- 주인공 : 나는 일어섰다.
"조르바! 이리 와 보세요! 춤 좀 가르쳐 주세요!"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 조르바 :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 야호!이리 오쇼!"
* 영화 `희랍인 조르바’(Zorba The Greek , Alexis Zorbas , 1964) 중 한 장면
춤으로 상징되는 조르바의 자유로움에 주인공은 처음에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지만, 알게 될수록 그의 자유로움에 감화되어, 주인공 역시 조르바와 함께 춤을 추게 된다. 이는 주인공과 조르바가 함께 한 사업이 비록 실패했다 해도, 미래의 이상과 현실의 자유의 조화에 대한 노력은 포기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함께 춤 춘다는 것은 서로를 온전히 바라본다는 것. 주인공이 조르바를 만나 흐릿했던 '자유'의 의미를 온 몸으로 체득했듯, 우리 역시 우리 안에 내재한 조르바와 마주하고 춤추며 삶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을 불태울 일이다. 나 역시 미래를 추구하는 이성적 자아와 현실의 자유를 좇는 본능적 자아가 서로 화합하며 공동의 자유를 함께 성취해 나갈 수 있기를.
마지막 장 조르바의 편지를 읽고서,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악기 '산투르' 연주 영상을 찾아 들으며 책을 덮었다. 비단 경제적 자유만이 아닌, 스스로의 삶에 있어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날을 마주하길 고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