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필요한 이유
친구들을 만나러 가기 위해 택시를 탔는데 기사님께서 먼저 말을 거신다.
"약속이 있으신가 봐요?"
"네 친구들 만나러 갑니다."
기사님 왈,
"나이를 먹으면 마음이 넓어져야 하는데 오히려 속이 좁아지나 봐요. 나이 먹을수록 애가 된다고 하잖아요. 모임을 하다 보면 삐쳐서 대화방을 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때마다 제가 그 친구들에게 다시 초대하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가지 말고 남아 있어, 나가면 외로워. 허허"
기사님이 웃으시며 툭 던진 한마디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은퇴 후, 달라진 모임의 풍경
은퇴 후 만나는 모임은 현역시절과 달리 이해관계나 상하관계가 느슨해진 경우가 많다. 주로 친목모임이다 보니 누가 위고 아래랄 것 없이 모두가 하나의 주체로 자리매김을 한다.
현역 때는 그날 대화의 분량을 보면 누가 상위에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은퇴 후에는 대화의 양으로 상하를 구분하는 건 불가능하다. 모두들 동등한 입장이라 여기는 순간 대화의 주도권은 선후배를 가리지 않는다.
특히 동기들 모임에서는 이런 양상이 더 심해진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가 그날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대개 한 두 마디의 실수가 튀어나오기 마련이고 감정이 상하는 상대가 발생하고 만다.
이때 과거처럼 참고 넘어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안 만나는 게 속 편하다"하고 떠나기 일쑤다. 그렇게 은퇴자 모임의 참여자 수는 하나 둘 줄어간다.
어떤 모임은 이런 일의 반복으로 서로 반목과 편 가르기를 일삼다 결국 깨지고 만다. 왜 그럴까 싶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이해가 가는 면도 있다.
인생 후반전에 세워지는 자존감
인생의 후반전을 맞이하면 대체로 삶의 궤적이 그려진다. 이제까지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의 모습까지 서로에게 어느 정도 예상이 되는 것이다.
큰 변수가 없을 예정이다 보니, 현재의 모습에 나름 의미를 부여하고 자존감을 세우려 하는 것 같다. 안 그러면 우울감에 빠져들기 때문에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사랑하려 하는 게 아닐까.
자기 사랑이 과잉이 되는 순간, 남의 사소한 말도 거슬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대 놓고 싸우기는 그러니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그 사람과 대면의 기회를 줄인다. 젊잖게 말해서 그렇지, 소위 '삐치는 거다.'
삐친 뒤에 찾아오는 것들
문제는 이런 행동 이후에 벌어지는 일이다. 처음엔 별거 아닌 것 같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작은 일이 아니게 된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없으니 말을 할 상대가 줄어들고, 움직일 동선 또한 좁아질 확률이 높다. 기껏해야 본인의 루틴을 소화하는 일정이 전부일테니 멀리 갈 일도, 수다 떨 일도 점점 사라진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우울감과 외로움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25년 발표한 보고서에서, 외로움과 사회적 고립은 뇌졸중, 심장병, 당뇨병, 인지 저하, 조기 사망의 위험을 증가시킨다고 밝혔다. 외로운 사람들은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두 배나 높다고 한다.
이는 사회적 관계가 단순히 심리적 위안을 넘어 우리 몸의 생리학적 시스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뜻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보면, 나이가 들면서 쉽게 감정이 상하고 삐치는 것이 왜 위험한지 알 수 있다.
한국의 한 연구에서도 사회참여가 활발한 노인일수록 우울감이 낮고, 주관적 건강상태가 좋으며, 삶의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 같은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노인분들이 있다. 이 중 노인회관에 다니며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분들은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 반면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은 어른들은 오랜만에 만나면 부쩍 늙어 보이고 건강도 나빠진 경우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것은 고독이 아니라 관계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완벽한 관계가 아니다. 비록 그 관계 속에서 때로 다투고 화해하며 지내더라도 그게 더 삶을 지탱하는 힘이 될 수 있다.
물론 혼자서 잘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산속에서 자신 만의 시간을 만끽하며 지내는 자연인들도 있고, 농촌에서 목가적 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모두가 혼자라고 외로운 건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에게 이런 삶을 살아가라고 권하기는 어렵다. 그 자체가 평범하지 않은 선택이고, 그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평범한 사람들이 가야 할 길은 더불어 살아가는 게 아닐까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자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예민해지고 쉽게 상처받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변화일 수 있다. 하지만 그 감정에 휩싸여 소중한 인연들을 하나둘 멀리하다간, 더 큰 고통인 외로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외로움은 단순히 심리적 문제를 넘어 건강과 삶의 질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아야 한다.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지 말고, 상대의 실수라고 생각하거나 나쁜 뜻은 없는 걸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
당장은 기분이 상해도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면 못할 일도 아니다. 다시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면, 지금 만남이 대단히 소중하고 어떤 말도 품을 수 있다.
먼저 손 내밀기
혹시라도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을 말을 했다면 늦지 않게 사과하는 것도 괜찮다.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게 나이 듦의 자세다. 그러고 나면 상대도 허허 웃으며 받아들이지 않을까.
혼자가 편할 것 같지만, 사람은 결국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가장 인간답게,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이것이 과학이 증명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사는 비결이다.
그동안 혼자 이런저런 생각으로 만남을 피해 온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해가 되었으니 인사차 만남을 먼저 제의해 보아야겠다. 하다못해 일 년에 한두 번이라도 만남을 이어가며 근황을 전하는 모임들이 있을 때 외로움에 빠지는 일은 없게 되리라.
관계가 나로 인해 줄어들었다면 다시 복원해 보는 노력을 해보면 어떨까
그게 서로에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