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자유로운 덕질을 소망한다.
눈을 감을 때마다 검은 살인자의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소년탐정 김전일’을 처음 접했던 고등학교 시절, 밤을 새워가며 60권이 넘는 시리즈를 모두 읽었다.
중학교 시절, TV로 보게 된 농구대잔치의 연세대 오빠들에게 반했다. 직접 만든 응원 플래카드를 들고 잠실체육관을 찾아다녔다.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미드’를 처음 접했다. 미국에서도 많은 과학자를 길러냈다는 ‘CSI:과학수사대’ 시리즈에 빠져 4개가 넘는 시즌을 일주일만에 몰아보는 기록을 달성했다. CSI 시리즈는 약 한 시간 분량의 에피소드 20여 개가 하나의 시즌으로 구성되어 있다.
좋아하는 드라마가 생기면 첫 화부터 마지막까지 밤을 새며 몰아보는 것은 기본이요, 같은 드라마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본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로 손 꼽는 ‘파스타’는 열 번 가까이 보았다. 배경음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장면과 대사들, 주인공들의 표정과 억양까지도 세세하게 떠오른다.
배우에게 꽂히면 상황은 심각해진다. 데뷔 시절부터 현재까지 출연한 모든 작품을 훑어야 한다. 단역부터 시작해 오랜 기간 활동을 시작한 경우, 어떤 작품부터 시작할지 내적 갈등을 겪기도 한다. 주로 영화에 출연했던 경우라면 왠지 고맙다. 16부작이 기본인 드라마보다 2시간 내외로 한 편을 끝낼 수 있으니까.
가수가 좋아졌다면 모든 앨범을 구매하는 것은 기본이요, 유튜브를 통해 공연 영상들을 섭렵한다. 종국에는 피나는 티켓팅, 피켓팅 전쟁을 치르고 공연에 가서 신나게 즐기고 와야 미련이 없다.
이런 내 성향을 잘 알고 있기에 나 자신을 ‘덕후’ 체질이라고 이야기한다. 지금도 나에게 온전한 자유가 주어진다면 나의 최애, 최고로 애정하는 배우가 출연한 16부작 드라마를 하루 안에 완주할 자신이 있다.
결혼 후 이어진 출산과 육아는 나의 모든 덕질을 중단시켰다.
덕질의 기본은 절대적인 시간 투자인데, 큰 아이가 태어난 순간부터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를 돌보는데 사용해야만 했다. 둘째가 태어나고 유치원에 다니게 될 때까지 아무리 크게 히트한 드라마라 하더라도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빼앗기는 덕통사고라도 일어나면 어떻게 될까? 폭주하고 싶은 내 안의 덕후 본능을 제어할 자신이 없었다.
아이들이 생존과 관련된 왠만한 일들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나이가 되니 비로소 여유가 생겼다. 웹서핑을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영상 클립에 마음을 빼앗겨 24부작 드라마를 몰아서 보고, 그 드라마에 나온 주인공의 필모그래피를 훑으며 또다시 덕후의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예전과는 달리 밤을 꼬박 새고도 다음날 학교에 가는 애들을 챙기고, 출근해서 회사 업무를 해야 하는 현실이 기다리지만.
지금은 두 아이 모두 십대가 되었다.
내가 보는 드라마나 사진첩에 모아둔 연예인의 사진을 들춰보며 한 마디씩 보탠다.
‘엄마, 이번에는 A야? 그 사람이 왜 좋은데?’
‘어, 엄마도 K 때문에 그 드라마 보는 거야? 요즘 그 사람 때문에 보는 사람 많다던데.’
아이들이 한 마디 던질 때마다 왠지 부끄럽고 불편하다. 덕질의 미덕 중 하나는 내가 좋아하는 무엇인가를 같은 덕후끼리만 조용히 즐기고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는 것인데.
아이들에게는 큰 사람인 ‘엄마’의 역할을 하는 내가 연예인 누구를 좋아하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에 관심을 쏟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어쩌면 어른의 권위를 잃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일기도 한다.
아직 아이들은 타인의 사생활을 어떻게 존중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한다. 나와 자신들이 함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관심을 표현하며 나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 하지만 나는 온전하게 ‘나만의 것’으로 간직하고 존중받고 싶기에 그 애정이 고맙지가 않다.
내 덕질에도 언젠가 봄은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