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름길에는 서사도 자부심도 없어

by 아피탄트

1. '공부 잘하는 약'으로 잘못 알려진 ADHD 치료제 '메틸페니데이트'

ADHD 치료제 메틸페니데이트 성분의 페니드정, 환인제약


뉴스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ADHD 치료제가 '공부 잘하는 약'으로 잘못 알려져, 오남용이 사회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해보셨을 겁니다.

'메틸페니데이트'라는 약물이 ADHD 환자에게 집중력을 향상시켜주는 효과가 있다보니, ADHD가 없는 사람에게 사용해도 집중력이 향상될 거라는 잘못된 믿음에 기인한 건데요.

실제로는 ADHD가 없는 사람이 해당 약물을 복용하게 되면, 오히려 신경전달물질이 과활성되어 되려 집중에 어려움을 겪게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 잘하는 약' 열풍은 사그라들지 않아 처방 환자와 처방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청소년과 청년층에서 그 비율이 두드러집니다.

약의 공급은 일정한데 수요는 폭증하다보니 품귀 현상이 생겨, 정말 약이 필요한 ADHD 환자들이 약을 구하기가 힘들어진 건 덤이죠.


시기별, 지역별 처방 현황에도 주목할만한 점이 있는데요.

시기별로는 모의평가가 있는 9월에서 수능이 있는 11월 사이에 처방량이 가장 많고 겨울부터는 다시 처방량이 감소하는 것이 특징이고,

지역별로는 교육열이 뜨거운 것으로 유명한 서울의 강남 3구(강남, 송파, 서초)와 노원구에서 처방량이 가장 많은 것이 특징입니다.



2. 끊을 수 없는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의 유혹


https://www.yna.co.kr/view/AKR20240912199100001


그런가하면 보디빌딩 및 피트니스 업계에서는 스테로이드 불법 투약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신체의 외형적인 부분이 곧 본인의 경쟁력과 직결된다는 인식이 강하다보니 약물의 유혹이 큰데요.

온라인 유통이 확대되면서 불법적인 스테로이드 사용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대회에서도 약물 사용에 대한 통제를 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국가 공인 대회에서는 도핑테스트가 의무입니다만, 그 외의 많은 사설, 동호인 대회, 체육회 비등록 선수들은 도핑 검사 대상이 아니다보니 사실상 약물 사용이 방치되고 있는 게 현실인데요.

이에 더해 사설 대회의 규모가 점점 커져 상금 규모가 커지고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서, '남들도 하니까 나도'라는 심리로 인해 더더욱 유혹을 끊어내지 못하게 됩니다.


스테로이드의 부작용에 대해서 여러 경로를 통해 한 번쯤은 접해보셨을텐데요.

불법약물을 사용하는 이들 역시 대부분 어느 정도는 스테로이드의 심각한 부작용(심장, 생식 능력 이상 등)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성과를 내고싶다는 욕망에, 또는 본인의 직역에서 더 나은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위험한 선택을 내립니다.



3. 심한 압박감, 그리고 적은 노력으로 큰 성과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심


위 두가지 현상엔 닮은 점이 있습니다.

제한된 시간 속에서 적은 노력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욕심, 그리고 그 성과가 미래에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줄 거라는 기대 심리가 그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인데요.

그러다보니 수험생도 보디빌딩이나 피트니스 업계의 선수들도 압박감을 느끼기 쉽고, 그게 동기가 되어서 '지름길'을 찾게 됩니다.

여기에 더해 약물 사용으로 인한 부작용은 즉각적으로 나타나진 않을 수도 있고, 모두에게 같은 정도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보니 과소평가 되기가 쉬운 것도 있겠죠.


동시에 '지름길'을 가는 사람을 적절하게 제재하지 못하다보니, 원칙을 지키고 공정하게 경쟁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박탈감을 느끼기 십상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더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는 사람을 뒤에서 바라만 봐야 한다면, 게다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따라잡을 수 없다면 누구나 그런 생각이 들겠죠.



4. 서사가 경쟁력을 만들고, 흘린 땀은 배신하지 않아


저는 약사로서, 약이 매개가 되는 사회문화적인 현상에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편인데요.

어떻게 접근해야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도 고민하곤 합니다.


그들에게 단순히 약의 부작용을 강조하며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말을 하거나, 선수들에게 단순히 도핑 금지약물이니 사용하지 말라는 것만으론 많이 부족합니다.

ADHD 치료제를 오남용하는 수험생들도, 스테로이드를 오남용하는 선수들도 어느 정도는 그런 위험에 대해 인지하면서도, 눈 앞의 성과를 위해 사용하는 것일테니까요.


그러나 더 긴 호흡으로 바라보면 그렇게 얻는 성과는 언제나 단발성일 뿐이고, 결국엔 내가 쌓아올린 서사가 '나'라는 상품을 더 경쟁력 있게 만들어줄 거라 생각합니다.

내가 흘린 땀과 내가 들인 노력은 나를 배신하지 않고, 그 과정에서 겪는 모든 우여곡절들이 다 자산이 되어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발생했을 때 그 위기를 돌파하게 만드는 힘이 될 테니까요.


'지름길'만 찾아다니는 사람에게는 축적되지 않는 자산이겠죠.


유튜버 미미미누

서사를 경쟁력으로 만든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로 유튜버 '미미미누' 님을 뽑을 수 있겠습니다.

다방면에서 활약 중인 그는 특히 수능을 앞둔 수험생들에게는 사실상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다섯번의 수능 응시 끝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는데요.

그런 우여곡절이 결국엔 본인의 서사가 되어 입시, 교육 영역에서 완전하게 본인의 입지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미미미누'님도 끝이 보이지 않던 수험생활을 할 땐, 그 경험이 훗날 지금의 성공을 만드는 기반이 될 거라는 생각은 못하지 않았을까요.


걸그룹 트리플에스의 유연

걸그룹 트리플에스 소속의 '유연'님도 3수 끝에 이화여대 과학교육과에 진학했는데요.

그 서사를 바탕으로 그룹 내에서도 많은 주목을 받는 멤버가 되었습니다.

트리플에스의 인원이 24명이나 되다 보니 현실적으로 모든 인원이 같은 수준의 관심이나 주목을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 긴 수험생활 끝에 이룬 성과를 본인만의 특별한 경쟁력으로 잘 활용했다고 생각합니다.



5. 자부심을 지켜주세요


또 다른 한 편으론 사회의 분위기도, 바른 길을 걷는 모든 사람들이 본인의 선택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끔 조성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자부심'이라는 단어 하나가 불합리해보이는 많은 것들을 이겨내게 만드는 힘이라 믿거든요.

군인, 경찰, 소방관, 필수의료과의 의료진, 과학자 등 많은 직역의 사람들이 불합리해보이는 대우 속에서도 자발적으로 그들의 일을 하게 만드는 게 바로 이 '자부심' 아닐까요.


비슷한 맥락으로 보디빌더, 트레이너를 비롯한 많은 운동선수들에겐 본인의 업이 곧 스포츠의 가치를 지키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갖게끔 한다면, 그 어떤 처벌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불법 약물을 멀리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이유에는, 사회의 다른 영역은 몰라도 스포츠에서만큼은 철저하게 공정한 경쟁이라는 중요한 가치가 지켜진다고 믿기 때문도 있을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반도핑 역시 단순히 금지약물에 대한 이해와 안내에 머무르지 않고, 운동선수와 스포츠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스포츠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일이 되어야 한다 생각합니다.

(저 역시 반도핑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미약하게나마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고민합니다.)


https://m.sports.naver.com/general/article/144/0000981216

작년 파리올림픽에선 전상균 선수의 동메달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2012 런던올림픽 때 역도 종목 최종 4위로 아쉽게 메달을 걸지 못했으나 3위 선수의 도핑 규정 위반이 발각되어 기록이 삭제됨에 따라 4위였던 전상균 선수가 동메달로 정정이 된 것인데요.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더라도 스포츠의 가치를 묵묵히 지켰던 전상균 선수가 더 큰 자부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름길'에는 서사도 자부심도 없고, 찰나의 성취와 끝없는 부끄러움만 있다고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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