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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Dec 13. 2023

안녕한 길을 따라 걷다

2. 우리 시의 가장 벅찬 젊음**

전쟁이 기억에 의한 기억으로 우리에게 남아 지금까지 읽히는 것이라면 전쟁은 포스트 메모리다. 사일구 혁명 사건이 끝나고 난 다음에 나에게 기억되는 건 김수영이었다. 불우한 시대 속엔 천재가 빛났다. 김수영이 이상처럼 천재냐고 묻는다면 고민해야 하겠지만 그의 태도는 정말로 ‘폭포’ 같았다. 그리고 그의 태도는 꼭 ‘곧은 소리’ 같아서 다른 ‘곧은 소리를’ 불러냈다.


훗날 이봉구가 김수영을 가리켜 ‘자유주의자’라고 말한 것은 그가 있어 자유민주주의가 만들어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김수영 한 명이 만들어낸 자유라고 하면 누군가는 ‘시인 나부랭이’라고 웃어넘길지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한 말은 단순히 한 명의 노력으로 일궈낸 결과라는 뜻이 아니다. 김수영 그는 자신이 도화선이 될 수 있게 나아간 사람이다. 자유에 대한 갈망은 어린아이처럼 낙관적인 것처럼도 보였지만 시대에 대해선 누구보다 깊이 공감하며 아파했다. 그런 그가 꺼내든 연필은 ‘시 나부랭이’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쓴 건 모두를 일깨우는 ‘참여시’였다.


김수영의 생애는 꼭 아침 드라마 같기도 하고 만화 주인공 같기도 하다. 아침 드라마치곤 김현경이 쉽게 돌아왔고 만화 주인공이라기엔 너무 쉽게 좌절했다. 누구보다 인간적이다. 그가 쓴 시 또한 인간적인 화자였고 주저앉는 순간과 좌절을 숨기지 않았다. 때론 조력자의 도움을 받고 삶을 살아가도 꿋꿋하게 시를 쓰는 것은 포기하지 않았다. 


다방에서 이루어지는 시 낭송은 낭만적이다 못해 아련하다. 1950년대의 감성이랄까, 멜랑꼴리 같다랄까. 술집에서 읊는 시 낭송도 마찬가지다. 반갑다고 악수 대신 서로를 알아보기 위해 시를 읊는 건 시인들만의 특권 아닐까. 어째서인지 문인들은 술을 너무나 좋아했고 김관식은 젊은 나이에 술 때문에 죽었지만 술을 탓하긴커녕 술에 위로받았다고 말한다. 문인들은 안주 대신 토론을 즐겼고 전쟁 직후 명동이 보여주는 낭만적인 색채는 곧 있을 사일구 혁명과 쿠데타 때문에 더욱 아련하게 보이는 걸지도 모르겠다. 이봉구가 달아놓은 술집 외상값, 전쟁 전의 명동이 그리워 소리 지르는 등의 모습은 지금의 우리에겐 영락없는 진상에 불과한 건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라고 최정례 시인이 시집을 썼었는데 그도 세상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지금 우리네 삶은 어디까지 믿고 믿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 가짜뉴스가 판치는 시대 속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는 되레 독이 되고 있다. SNS를 위해 사는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이 보이는가 하면 자신의 위치, 행동 모든 것을 밝히는 사람이 있다. 셀프 ‘트루먼 쇼’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돈을 위해 스스로를 불행하게 만든다. MZ세대는 분명 청춘을 불태워야 할 나이인데 엔진으로 쓰일 가연성 재료가 없어 보인다. 이제는 열정이 다 타버려서 번아웃이 기본 소양 중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의 힘듦이 앞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거라는 불안, 외적인 요소가 아닌 내적인 요소의 미해결은 사람을 옥죄게 만든다. 차라리 누군가가 ‘2년만 고생하면 돼요, 제가 봤어요’라고 차라리 말한다면 조금 더 살 힘이 날 텐데.


김수영은 그 기약 없는 싸움을 홀로 짊어진 거다. 그가 마르크스 같았다면 ‘자유주의 선언’이라는 책을 썼었을 텐데.    

 

  ‘모두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오늘은 이 일을, 내일은 저 일을, 즉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를 한다. 저녁에는 소를 몰며, 저녁을 먹은 후에는 비평도 해본다. 그러면서 사냥꾼도 아니고, 어부도 아니고, 목동도 아니고, 비평가도 되지 않아도 된다.’      


김수영이 말한 자유와 닮아 보인다. 그렇지만 김수영은 좌파가 아니다. 이봉구의 말마따나 그는 자유주의자. 학생들이 피 흘려 이뤄낸 사일구 혁명을 알기에 박정희 정권을 군사혁명이 아닌 쿠데타라고 화를 낸다.


김수영의 생애를 알수록 양파처럼 하얀 속살을 드러낼 줄 알았는데 웬걸, 그의 시만큼이나 단단한 정신이 드러났다. 사실 김수영의 시는 반서정적이며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읽을수록 가슴에 남았다. 그가 겪은 레드 콤플렉스, 아내인 김현경, 거제 포로수용소 등 컨텍스트를 알아갈수록 시의 깊이가 배가 됐다. 이 중 레드 콤플렉스는 기원적이라서 어쩌면 오이디푸스 왕처럼 죽어서 해방되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김수영은 포기하지 않았다. 민중이 주가 되어 민주주의를 이뤄낸 순간을 목격했다. 사상이 더해진 잔인한 폭력에 생긴 인간 불신에도 그는 자유를 외쳤다. <명동백작>에서 김수영이 죽음 후 바다에 뛰어들어 물장난치는 장면이 나온다. 순수해 보였다. 그가 말한 자유처럼.


혁명은 고귀했다. 그의 시처럼, 이라고 하고 싶지만 그의 시는 절대 고귀하지 않았다. 그의 시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외치는 옹졸함이다. 그는 부정 규탄에 머무르지 않고 나아가 자유를 외쳤다. 순수한 자유, 타협 없는 인간 정신의 완벽함을 추구했다. 김수영에게 자유란 순수한 물과 같아 폭력은 그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쿠데타에 분노해 그는 서정을 쓰지 않게 됐다. 그럼에도 그가 썼던 시는 고결했다. 산문적인 어투는 타동사 같았다. 베다, 찌르다, 뚫다 등의 타동사가 필요로 하는 목적어에 김수영은 민중을 병치시켰다.


민중은 시대에 베이고 찔리고 뚫린 시대적 아픔의 명사이지만 이는 단순한 역사적 가치로 한정되는 게 아니다. 50~60년대의 시대적 아픔이 지금의 우리에게 전이되고 우리가 공감한다는 건 그의 정신의 고결함 때문이다. 어쩌면 김수영이 말한 자유는 공산주의처럼 이상적이고 유토피아적일지언정. 실패하고 불가능해 보여도 시도해보아야 아는 거다.      


도적이 우리 집을 노리고 있다

(중략)

개가 여러 번 짖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귀찮아서 나가지를 않았다

쥐보다 좀 큰 도적일 거라 아마

그 정도일 거라     


「도적」의 일부분이다. 그는 ‘놀라지 않’는다. 실제로 나가보지 않고 ‘쥐보다 좀 큰 도적일 거’로 생각한다. 이 모든 것은 추측일 뿐이다. 도둑이 아닌 고양이였을 수도 있으며 도둑이 ‘철사’만을 노리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에 까봐야 아는 거다. 끝까지 혁명의 가능성과 자유를 노래했던 김수영의 시가 지금까지 공감되고 읽힌다는 건 2022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공유되는 어떤 게 있다는 거다. 시대적 아픔의 전이는 세대 갈등 완화의 희망으로 쓰이길 바라며.


군인에게 애국심을 빼면 살인자에 불과하다는 잔인할 말을 봤다. 당대의 사상을 강요받은 경찰에게 개인의 잘못이 없다는 것을 김수영은 알고 있었다. 레드 콤플렉스로 인해 꼭 버려진 개처럼 마음을 여는 데 고생한 김수영은 본질이 바뀌길 바랐다. 피를 흘려선 안 된다. 4월 이후에도 시는 필요하니까. 이후에 시인 같은 시인이 더 많이 나올 것으로 믿었다. 그는 미래지향적인 게 아니다. 세상을 사랑한 거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그는 시를 썼다. 진짜 시는 자네(우리)들이 흘린 피였으니까. 그렇기에 진짜 시는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가는 거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고.


‘시도 시인이 시작하는 것이다. (중략)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그것을-’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시작한’다는 건 그의 시어를 빌리면 ‘김일성만세’다.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아는 시인은 ‘김일성만세’를 부름으로써 자유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의 아이러니함을 적절하게 설명한다. ‘혁명은’ ‘고독해야’ 한다. ‘무된 밤에는 무된 사람을 축복하’는 세상이 올 때까지. 


    잡초 같았던 민중이 이뤄낸 사일구 혁명 그 이상을 나아가야 진정한 자유였다. 모두가 모두를 축복할 수 있길, 그것은 춤을 출 수 있어야 진정한 혁명이라 말한 68혁명과 닮아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긴 자유의 가치를 다시금 되뇐다. 그것이 김수영이 남긴 의의이자 그를 기리는 정신일 거다.    


<명동백작>에서 캡처함


*이 시리즈는 연작입니다.

**소제목은 김수영문학관 팜플랫에 적힌 문구를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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