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일기
슬기로운 학원 생활의 두 번째 글이다. 맞나. 사실 시간 개념이 좀 사라졌다. 제목 옆에 (2)를 붙일까 말까 하다가 앞으로도 계속 헷갈릴 것 같아 빼기로 했다.
800페이지가 되는 분량의 책을 하루 만에 읽으려고 무리하다 무리했다. 밤 9시부터 새벽 1시까지, 다음 날 오전 6시부터 오후 13시까지 읽었지만 다 읽긴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대학원 생활 3주 만에 난 과제도 불이행하는 학생이 되었다. 교수자는 쉬지 않고 말하는 분이었다. 3시간 동안 어떻게 나 혼자 떠드냐고 일찍 끝내주겠다고 했지만 14시부터 17시까지 알차게 강의를 꽉 채우셨다.
학원의 수업은 16:40분부터. 16:50분부터 학원 원장 쌤에게 계속 전화가 왔다. 머리가 아팠다. 53분 쯤, 강의가 끝날 기미가 보이는데 끝나질 않아 조용히 교수자에게 얘기했다. 먼저 가봐도 되냐고.
5시까지 아니었어요?
아.. 16:50분이요.
첫 날, 오티에서 강의가 끝나고 교수자에게 따로 얘기를 했었다. 혹시 16:50분 넘어가면 먼저 가봐도 되냐고. 그러라고 했다. 그러곤 얘기했다. 혼자서 어떻게 3시간을 꽉 채우냐고. 그 전에 끝내줄 거라고.
나는 학원까지 자전거를 타고 전력질주했다. 택시보다 빠를 거로 생각했다. 자전거는 일단 무법이었으니까. 그렇게 진짜 17:10분에 도착했다. 10분만에 왔다. 17시에 자전거에 오르면서 X 됐다만 연신 외쳤었는데.
평소 같으면 중2부터 수업인데 중1부터 하라고 했다. 중1 학생들은 시끌벅적했다. 3주 째라 그런지 학생들도 나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연 것 같았다. 자, 숙제 해왔지? 라고 말하며 나는 책을 펴라고 했는데 아무 반응도 돌아오질 않았다. 고개를 들어 학생들을 보자 다들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
21페이지까지 풀어오라고 했잖아?
몇 명은 네, 라고 작게 외친 것 같은데 13명의 아이들 중 2명 정도만 대답했다. 어떤 아이는 쌤, 풀었는데 집에 책 놓고 왔어요. 쌤, 오늘도 잘 생겼네요. 나는 내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중1 입에서 나올 말인가. 쌤, 오늘도 잘 생겼네요라고 말한 학생은 그 말을 남기곤 잠에 들었다. 저번주엔 몰래 폰 만지느라 바빴는데 이번엔 자느라 바빴다.
다음 수업은 중2였다. 가장 활발하며 시끄러운 반에 해당한다. 학생들은 7명으로 정예 인원인데 13명에 절대 지지 않는 화력을 가졌다. 오늘 한 친구가 더 추가 되었는데 아직까진 조용하다. 그런데 이런 중2 반이 오늘은 나름 조용했다. 나름.
일단 중1 학생 중에 자느라 바빴던 친구에게 나머지 공부를 시키려고 했다. 고3 학생이 혼자 문제를 풀고 있길래 그 앞에 앉혀서 21페이지까지 풀라고 했다. 중1이면 고3 남자 애를 무서워할 거로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쌤, 여기 개좋은데요?
미친.
실수로 입 밖으로 나왔다. 쌤, 미친이라뇨.
다음 주까진 풀어와야 돼.
쌤, 그냥 저 여기서 풀면 안 돼요?
과학 수업(중1의 다음 수업은 과학이다) 들어야 하니까 들어가자.
쌤, 여기 좋은데.
다음 주까지 안 풀어오면 어떻게 할 거야?
잘 하던 대답이 사라졌다. 이 친구는 자기가 귀여운 걸 잘 아는 친구였다. 귀여움과 사랑을 많이 받아온 학생이라는 게 느껴지니까. 그래서 싸가지가
다음 주까지 안 풀어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나는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앵무새와 다른 게 있다면 웃음을 잃지 않다는 것. 그 웃음이 어떻게 보일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내가 하는 말이 새의 언어처럼 들렸던 걸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00아,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하니까 장난 같아요?
쌤, 무서워요.
그 말에 무너졌다. 내가 애 앞에서 뭐하는 건가 싶기도 했고. 그게 중2 수업할 때도 신경이 쓰였는데. 그 친구가 과학 수업 끝나고 해맑게 웃으면서 집에 가는 게 보였다. 나만 혼자 신경 쓴 건가 싶기도 하고.
중2 수업도 끝내고 다음은 고1. 배가 고파 가방에서 빵을 하나 꺼냈다. 먹다가 떨어뜨렸다. 내 저녁은 그렇게 사라졌다. 마지막은 고2 수업. 대한민국과 오만의 축구 경기가 진행 중이었다. 빨리 수업을 끝내고 후반전을 볼 수 있게 약속해줬다. 개인적으로 가장 편한 수업이기도 하다. 나름 내 삶에 있어서는 오래 그 나이 대 학생을 가리켜서 그런가 보다. 특히 그 나이 대의 남자 애였고 성적도 비슷했고. 가장 자신감 넘치는 수업.
중학생 수업 때는 이걸 어떻게 알아 듣게 하나, 재밌게 수업을 하나가 목표인데 고등 수업은 편한 점이 많다. 너희가 이 정도는 알아 들어야 돼, 집중도 너희가 해야지. 사실 이 점이 편하다. 중학생 수업은 집중 시키다가 포기하고 싶어질 때가 매번이다. 5분마다 리셋되는 그 친구들의 태도를 보면 학교에서의 모습이 상상되질 않는다.
나의 슬기로운 학원 생활은 현재 진행 중인데 이렇게 살다간 과로사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대학원 하나만 다녀도 빡세다는 걸 간과했다. 유튜브 영상 채널도 고민 끝에 하기로 했다. 제작비 5만원이 너무 걸리지만 하릴없다. 그게 규칙이라는데 뭐.
작가는 제작비 거두지 말자는 얘길 감독이 한 듯한데, 반발이 심했다고 했다. 심지어 이기적이라고까지 말이 나왔다고 한다. 이기적이라. 잘 모르면 쉽게 말이 나온다. 오랜만에 들어본 험담이라 그런가 침대 머리 맡까지 따라왔다. 잠에 깨고 아침에도 떠올랐다. 이기적이란 말을 내가 이불 속에 숨겨놓은 것마냥.
돈 내고 글 쓰는 게 마땅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서로가 서로의 포지션이 아니고 입장이 다르기에 그런 말이 나온 것 같다. 역시 세상은 어렵고 모르겠다. 학원생들은 너무 귀엽지만 이 친구들도 나와 같은 길을 걷게 될까 봐 하는 안타까움이 든다. 공부가 쉬워. 물론 나도 잘 몰랐고 그땐 안 했지만. 너희가 나중에 뭘 하고 싶어질 때 공부가 발목 붙잡으면 얼마나 서러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