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지 않고 살아남은 겁쟁이의 기록을 시작하며
나는 타고난 도망자다.
감당하기 벅찬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나는 젖지 않는 곳을 찾아 더 높은 곳으로, 더 구석진 곳으로 몸을 피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행위 또한 다르지 않다.
싸우기 위해 펜을 들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지만, 사실 브런치라는 이 플랫폼은 나에게 거대한 도피처다. 활자 뒤에 숨으면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할 테니까.
나는 괴롭힌 그 사람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자판 위에 올려진 손가락은 머뭇거린다.
혹여나 이 글이 그 사람에게 닿아 생채기라도 낼까 봐.
가해자를 걱정하는 피해자. 이 모순적인 태도야말로 내가 도망자라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이것은 나의 이야기지만, 동시에 도망치는 법만 배운 당신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