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용서는 치유가 아니었다.
사실 내가 쥐고 있던 칼날이 무뎌진 건, 내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었다.
찌르고자 했던 대상이 이미 썩어 문드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평생을 갉아먹었던 H. 그는 이제 너무 작고 초라해져 버렸다.
얼마 전 그가 내게 건넨 말은 사과라기보다는 비겁한 항복 선언에 가까웠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너도 나를 좀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그의 입에서 나온 변명은 조잡했다.
하지만 비극적이게도, 나는 그 조잡함을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기본적으로 세상이 멍청한 자들로 가득 차 있다고 믿는 비관주의자다. 그 거대한 멍청함의 흐름 속에서 H 역시 별다를 것 없는, 그저 흐름에 휩쓸린 또 하나의 어리석은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악당이 아니라, 그저 멍청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멈칫거린다. 이 글이 세상에 나가 그를 손가락질할 때, 이미 삭아버린 고목 같은 그가 완전히 부러져 내릴까 봐. 가해자의 안위를 걱정하는 피해자라니. 나는 나를 찌른 사람의 상처를 염려하느라 정작 내 피가 멈추지 않는 줄도 모른다.
이 말도 안 되는 모순이, 그가 휘둘렀던 폭력보다 더 깊숙이 나를 찌른다. 사과와 용서는 치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고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