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기 위한 준비
복수라는 거창한 이름은 이제 내려놓자.
진정한 복수는 상대를 찌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평생 닿을 수 없는 속도로 멀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미운 사람이든, 지긋지긋한 가난이든, 혹은 나를 갉아먹는 열등감이든 간에.
우리는 이제 도망칠 것이다. 비겁해서가 아니라, 살고 싶어서.
"도망치지 말고 부딪쳐라.”
이 말은 우리가 충분히 단단해져서, 부딪혀도 깨지지 않을 때 유효한 조언이다.
지금의 우리는 부딪히면 깨진다. 그러니 우리는 깨지지 않기 위해 튀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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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우리는 각자의 가장 멋진 속도로 도망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각자의 ‘참호’를 파야한다.
도망칠 땐 치더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최소한의 안전지대는 필요하니까.
참호속에서 우리는 덜 아파야하고, 잠시나마 우리를 쫓는 것들로부터 안전해야한다.
참호는 물리적인 공간이 될 수도 있고, 특정한 행동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헬멧을 쓰고 달리는 도로위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한강변이, 또 누구가에겐 조용히 문장을 적어 내려가는 작은 방이 그 참호일 것이다.
하지만 명심해야 한다. 그 참호는 '평생 살 집'이 아니라 '잠시 머무는 텐트'여야 한다.
그 좁은 구덩이의 안락함에 취해 영영 주저앉아 버린다면, 그것은 도망이 아니라 '고립'이 되어버리니까.
안주하는 것 또한 도망의 한 방법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도망치기로 했으므로 그 방법은 과감히 버리자.
참호가 단단히 구축되었다면 이제 준비는 끝났다. 고개를 들어, 어느 방향으로 튈지만 정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