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라는 한국 여자

by 배운

지금으로부터 두 달 전, 내가 8년 간 다니고 있는 정신과의 의사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내게 물었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 말씀 무지하게 안 들었죠? 왜 이렇게 말을 안 듣습니까?

약을 먹다가 끊다가, 병원을 왔다가 말았다가…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2015년 공황장애 진단, 2019년 우울증, 2020년 경도의 양극성 장애…

그리고 다시 2022년 공황장애가 재발했다.

치료를 제때 잘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밟는 정석 코스라고 했다.

의사의 말은 잘 듣지 않았지만 내 병의 진행은 교과서와 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2022년 8월, 내가 친정 엄마보다 더 의지했던 시어머니가 급작스레 돌아가셨다.

3년간 암으로 투병 중이셨지만 병원에서 마음의 준비하라는 말 한마디 없을 정도로 평이한 상황이었는데,

환자의 건강 상태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병원의 무리한 진료로 어이없게 돌아가시고 말았다.


꼬박 열 하루를 장례식장과 시댁에서 보냈다.

나는 매일을 울며 어머님의 여동생(이모님)과 함께 어머님이 남기고 간 넘쳐나는 세간살이들과 4대의 냉장고를 정리했다. 남편의 누이마저 왜 자기 엄마 물건을 뭐가 그리 급해서 빨리 치워 버리려 하느냐고 약간 서운함을 내비쳤지만, 나는 살아생전 어머니에게 상처만 준 여섯의 시고모들이 어느 날 들이닥쳐 어머님의 물건 하나라도 빼앗아 갈까 염려되었다.

사업 수완이 없어 말아먹기 일쑤인 어머니의 남편을 대신해, 20년 간 작은 백반집을 운영하며 자식 셋을 키웠던 그녀의 세간살이는 버리지도 못한 채 쌓아둔 온갖 잡다한 것으로 넘쳐 났다.


어머님이 투병 중에 힘들어서 미처 다 짜지도 못한 매실액을 거르고, 큰 말통 속 멸치 액젓을 소분하고, 다 드시지도 못하고 가신 각종 한약재 들과, 당신 자식들 반찬을 해주려고 꽁꽁 모아 둔 식재료들을 버렸다.

자식들이 사준 명품 옷과 명품 가방들은 몇 번 입지도 못한 채 장롱 속에 고이 걸려있었으면서도, 시장 통에서 산 세벌에 만 원짜리 바지는 여러 벌이었다.

자식들이 매월 준 용돈들은 차곡차곡 모아 몇 천의 거액이 되어 통장 속에 그대로 있었으면서도, 그 싸구려 고쟁이 주머니에서는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가 수시로 나왔다.


그렇게 많은 살림이 투병 중에 힘드셨으면, 10분 거리에 사는 나를 불러다 한번 청소라도 시켰을 법도 한데, 어머니는 절대 그러시는 법이 없었다. 친척들은 하나 같이 입을 모아 말했다.


“그저 며느리가 아까워서…”


그렇기에 나는 어머님의 매실액 한 방울도 소중했고, 고쟁이 한 벌도 허투루 버릴 수 없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입관식을 할 때, 어머님은 입을 굳게 앙 다물고 있었다.

74년여 그녀의 삶이 그랬다.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것, 사고 싶고 먹고 싶은 모든 것을 속으로만 삭였다.

암이 자궁을 떠나 폐를 치고 올라가 뇌를 강타하는 고통 속에서도, 아프다는 말도 제대로 못 한 채 이를 악물고 참았을 것이다.


그 모습이, 바로 ‘어머니’라는 한국 여자의 현실이었다. 어머니가 아파 침대에서 나뒹굴 때에도, 쌀도 겨우 씻을 줄 아는 아버님은 자신의 저녁거리를 걱정하며 안방 문을 빼꼼히 열었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어머님의 부고 후 열 하루가 지나 결국 과로와 탈진으로 응급실에 갔고, 다시 공황장애 증상이 나타났다. 어머님이 없는 현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비현실감은 증폭되었다. 내가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이인증이 나타나고, 나의 실체와 내가 분리된 것 같은 착각이 계속되었다.


참고 사는 것이 미덕이어야 했던 한국 여자, 어머님의 인내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나의 현실 또한 다름없었다.

어떤 확고한 결심으로 털고 일어선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변화를 원하고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나는 나를 둘러싼 것으로부터 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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