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자유

by 배운

쓸쓸한 가을바람이 훅하고 들어오면 나는 안도한다.

역시 봄보다는 가을이다. 행복하라고 꽃핀다고 노래하는 봄이 정말 싫다.

사실 봄이란 엄청나게 짜증 나는 계절이다. 따뜻한 것처럼 가식 떨며 시작되지만 실은 날리는 꽃가루와 미친 황사바람과 각종 미세먼지에, 짜증 나게 춥다. 차라리 ‘이제 다 끝났소.’라고 말하는 듯한 가을바람이 낫다.


반드시, 10월 중순 이후의 무르익은 가을이어야 한다.

절대 더운 날은 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어, 드디어 여름옷을 세탁소에 맡기고 장롱에 넣어야 하는 시점, 보일러를 켜지 않은 새벽에 침대에서 내리는데 차가운 방바닥에 발바닥이 닿을 때 찰싹! 하고 추위가 나를 때리는 그 느낌. 그것은 '이제 정신 좀 차려도 돼.'라는 위안으로 들린다.


살랑거리는 척하는 봄바람보다 차갑게 때리는 가을바람이 훨씬 매력 있다.

거기에 평소에도 좀 우울한 나에게는 실컷 우울해도 될 것 같은 분위기가 더욱 힘을 실어 준다.

무언가 위안되는 기분이다. 원래 세상은 우울한 거야. 너의 우울한 세상이 드디어 왔다. 이제 실컷 가라앉아보자. 뭐 이런 것 따위이다.


이렇게 말해보니 진짜 시시하고 겉멋에 쩌든 20대의 작가 지망생 같다.

한때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을 굉장히 싫어한 적도 있다.

그들의 에세이에서는 맨날 우울에 절어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다시 술 먹고 담배 피우고 그 나태의 일상들이 자기 탓이 아니라고 세상에 외치는 것이 무슨 예술가적인 반항심 인양 굴며 아무렇게나 글을 써댄다고 생각했다.

진짜 꼴 보기 싫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나도 참 그런 짓을 많이 하고 있다.

쓰면서 또 앞뒤가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든다. 의식의 흐름대로 쓴다고 하지만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버려두고 있는 건지 아니면 흰 바탕 위에 낙서하듯 쓰면서 의식이 따라가는 건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아무튼 가을바람이 일면 나는 오래된 양옥집의 구석방이 생각난다.

5학년 때 이사 간 우리 양옥집은 꽤 널찍하고 좋은 집이었다. 큰 다락과 너무 넓은 지하실도 있었다.

마당에선 늘 개를 키웠고 잠깐이지만 닭도 키운 적이 있다. 그 큰 개와 닭은 그들이 어른이 되자 슬그머니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아버지가 시골에 자유롭게 살게 보냈다고 했는데 당시에는 어디에 팔았거나 시골 어른들과 잡아먹었을 거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진짜 생각도 못한 건지, 아니면 그렇게 믿고 싶었던 모양이다.


공부해야 하는 언니와 아들인 남동생이 각각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나니, 주방 끝에 작은 문고리가 달린 쪽방만이 남았다. 옛날에 부엌데기라고 불렸던 가사도우미가 거주했던 방이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된다.

아무튼 엄마는 약간 미안한 마음을 숨기려는 듯 알고 보면 제일 좋은 방이라며 되려 뻔뻔스럽게 소리치며 내게 선심 쓰듯 그 방을 내주었다. 나는 겉으로는 나만 항상 차별한다며 서러워했지만 내심 그 방이 마음에 들었다.

그 방은 일어서면 머리가 닿게 다락방처럼 천장이 비스듬한 구조였다. 책상 하나를 겨우 넣고 나니 내가 누우면 문도 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워크맨으로 '별이 빛나는 밤에'를 틀어 놓고, 뜨끈한 구들방에 누워 발을 꼼지락 거리는 그곳의 잠자리가 마음에 들었다. 마치 신데렐라가 된 기분으로, 모두가 내편은 아니지만 나는 나무도 별도 다 내 친구인 것 만 같았고 나는 이 세계와 동떨어진 작은 외계인 일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곳에 굴을 파고 들어간다. 집안의 모든 소리와 차단되는 쪽방,

끔찍한 집안의 무거운 공기와 완전히 분리되어, 나는 그곳에서 가난한 시인이 되는 것을 꿈꿨다.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지독한 불면증을 이겨 내기 위해 머리맡에는 항상 양파와 파를 둔 채로, 비스듬한 다락 모양의 천장에 짧은 시를 썼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별이 어쩌고 하며, 여기 오는 사람들은 다 행복할 거라는 글들을 썼던 것 같다.

내가 쓴 그 구절은 평생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세월이 쌓이니 다 잊어버렸다.

내가 커서 이곳을 떠나고 다시 누군가가 와서 그 글을 읽는다면 행복해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결국 그 집은 내가 스물다섯 살 때 다 허물어지고 말았지만, 그렇게나 나는 그곳에서 글 쓰는 시간을 사랑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글을 쓰는 일이 싫어졌다. 아니 무서워졌다.

글을 쓰면 자유롭고 훌훌 내려가는 숭늉을 마신 듯 속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는데, 글을 쓰니까 진짜 내 마음이 아닌 다른 감정이 써지고, 객관화도 되면서 시시해졌다가, 결국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나조차도 모를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횡설수설한 말들이 써진다.

지금 이 문장처럼 말미에는 주어를 잃어버렸다가, 앞 이랑 뒤에서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인지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서 지웠다 다시 쓰기를 반복하면 그 왜곡은 더 심해진다.

처음 말하고 싶었던 것이 뭐였지. 제기랄. 뭔가를 엄청 쓰고 싶은데 도무지 주제가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하다 주제가 떠올랐어도 끝을 내기가 어렵다. 필력을 연습하기 위해서는 계속 쓰는 수밖에 없는데 그것조차 열심히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단지. 잊지 않기 위해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현재의 나는 늘 그렇듯 불안하고 여리지만 행복하다.


마음 가득한 행복이 내게 왔다는 사실은 마치 거짓말 같다.

나는 이 행복이 우연 같다고 하지만 사실은 참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이 행복을 향해 달려왔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자신 있고 대견하다. 참으로 감사하고 사랑스러운 삶이다.


어느 날 야근 후에 탄 택시 안에서 한강 다리의 불빛을 바라본다.

빨강 파랑 초록으로 색색이 번진 불빛을 보며 생각하니, 평소에는 죽음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마 죽을 때 이 불빛이 떠오른다면 아쉬울지도 모르겠다.


인생에 이토록 자유로운 시간이 있었고, 이토록 아름다워서 눈물이 났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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